축구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달콤했다!
김혼비의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나도 언젠가 축구를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이 축구를 하기 위해 철봉 운동을 하고 머리를 짧게 치는 모습은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 언니들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고 싶었다. 나도 축구를 하면,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2022년 우리 가족은 K리그의 열정적인 팬이 된다. 원래부터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나와 첫째와는 달리, 운동이라면 고개부터 젓는 남편이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시발점은 브라질전 직관이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와 브라질의 평가전을 보고 온 남편은 세계 정상급 축구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남편은 네이마르가 유명한 골키퍼인 줄 알았던 축알못이었다. 손흥민이 어느 팀에서 뛰는지도 모르던 사람이, 필드에서 종횡무진하는 네이마르를 보고 나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브라질전 이후의 모든 평가전을 직관하는 것에도 모자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경기를 찾아 우리 가족은 K리그 경기까지 보게 된다. 그 경기는 수원FC와 서울FC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카타르 월드컵의 결승전만큼이나 치열했던 명승부였다. 2:0으로 지고 있던 수원FC가 후반전에서 2골을 넣더니, 후반에 1골을 더 넣어 역전에 성공해 버린다. 그런데 후반 추가 시간에 서울이 1골을 더 넣어버리고 동점이 되는 듯했지만(여기까지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종료 휘슬이 울리기 5초 전(적어도 내 느낌은) 너무나 멋진 수원FC의 헤더골로 수원FC가 믿을 수 없는 승리를 했다. 이것은 수원FC가 서울을 이긴 최초의 경기였고, 수원FC 팬들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코앞에서 이 광경을 본 우리는 정말 미칠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경기장을 나설 때 우리는 수원FC의 팬이 되어 있었다. 경기 내내 목 터져라 응원을 했던 첫째는 밤새 꿈에서도 응원을 하느라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여름 내내 축구에 빠져 살았다.
K리그를 보면 볼수록 우리만이 아는 재미와 감동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고 싶다는 충성심이 생겼다. 우리는 올 시즌 거의 모든 경기를 보고, 경기를 분석하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선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름 내내 축구로 달아오른 우리 가족은 신이 나기도 했지만 점차 외로워졌다. 해외리그를 보는 사람은 많지만 K리그를 챙겨 보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왜 이 재미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명승부가 펼쳐진 경기 다음날에는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축구에 대한 수다 갈증은 그동안 잊고 있던 ‘실제로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상기시켰다. 내 주위에 축구팬들이 없으면 내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나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곁으로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직접 축구를 하면서 축구를 관전하는 실천형 K리그 팬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나의 첫째는 올여름에 취미축구반과 더불어 축구선수반까지 추가한 상황이었기에 나의 이러한 결심은 온가족의 응원을 받았다. 찾아보니 어느새 나같이 평범한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축구 클럽이 매우 많았다. 티비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여자축구 클럽이 매우 많아진 이후였다. 여러 클럽들 중 우리집과 가장 가까운 ‘미라클FC’를 선택한 나는, 드디어 위풍당당하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다.
축구를 하러 간 첫날!
가볍게 몸풀기부터 시작되었다. 선수들이 필드에서 하던 몸풀기와 비슷한 동작을 내가 하다니! 그런데 5분이 지나자 설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잔디밭 위에는 꺼억꺼억하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격렬한 몸풀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몸풀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다음 이어진 드리블 연습에서는 축구공을 발에 대 보는 것이 40년 인생에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첫째와 공으로 좀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착각이었다. 놀이터에서 공차며 노는 것과 진짜 축구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마음대로 절대 움직이지 않는 발과 다리는 나를 절망에 빠뜨리게 했다. 첫날 연습을 마치고 너덜거리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내게 첫째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처음에는 원래 그래.”
미라클FC의 퇴근반과 오전반의 빅매치는 나의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나는 겁이 많아 가슴 트래핑도 성공한 적 없고 볼 간수 능력도 우리 팀 최하 수준이다. 우리 팀에는 시작부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에이스들이 있다. 그녀들은 코치님이 알려 주시는 것들을 쏙쏙 받아들여 나날이 발전했다. 당연히 이날도 나는 교체 멤버였다. 후반전에 드디어 필드로 나간 나는 다른 건 못하니 열심히 뛰기만 하자 마음먹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게 공이 흘러왔다. 나도 모르게 발을 뻗어 그 공의 옆면을 건드렸는데... 골인!
아,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표현할 수가 없다. 골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고 팀이 모두 하나가 되는 그 기분. 나는 월드컵에서 자신의 몸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뛰는 선수들이 그 순간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축구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나도 40년 동안 처음 느낀 크나큰 감정이었는데, 평생 축구를 한 선수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일주일에 한 번씩 퇴근하고 풋살장에 가서 축구를 배운다. 매번 새롭고 신기하다. 내 몸이 이렇게 안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고 허벅지 뒤쪽 근육이 당기는 느낌도 처음이다. 선수들이 왜 그렇게 햄스트링이 올라오는지 이해되는 것도 웃기다. 아직 축구를 하는 내가 낯설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솔직히 축구를 보는 것보다 ‘하는’ 게 훨씬 재밌다. 학창 시절 남자 아이들이 밥을 마시고 점심 시간 내내 축구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해서 임팩트 있는 슈팅을 차고 싶고, 체력이 좋아져서 필요한 순간에 오버래핑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백승호처럼 기습적인 중거리슛을 해보고 싶다.
매해 나이드는 것은 서럽지만 그 시간만큼 축구 실력이 좋아질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2023년에 미라클FC 등번호 8번(백승호의 8번을 따라함) 아줌마의 축구 실력은 얼마나 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