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me Nov 30. 2022

스님, 바람 나시다

  선방에서 동안거가 해제되는 정월 대보름날이다. 보름달이 훤하게 길을 터준다. 송광사에서 겨울 수행을 마치고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 표정이 신문 속에서도 맑다. 서릿발 성성했던 냉기가 사라지고 새파란 보리 순이 푸슬푸슬한 땅의 봄기운을 빨아들인다.  


  산과 들이 입춘 바람에 들썩인다. 이제 곧 갖가지 색이 땅에 뿌려지며 대지가 온통 풀물이 들것이다. 서문署門들이 걸친 옷, 모자, 걸망 모두 거무레한 잿빛이나 제 절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벌써 봄기운에 풀렁거린다. 겨울을 다부지게 이겨내고 솟아나는 봄의 전령을 닮았다.


  대지로 봄기운을 살려 보낸 것은 무엇인가? 선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일상 안거가 시작되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발걸음은 순진무구한 동자승의 유쾌한 모습이다. 겨우내 칩거하며 풀어낸 생각이 선방에 고였다가 선방 문 나서는 날 우르르 따라나서 달님께로 날아오른다. 그대들의 기도로 내딛는 걸음마다 초록 바람 곳곳에 뿌려지리라. 속가의 습성이나 잡념을 머릿속으로 비우고 비우는 것이 공空이 아니라, 참으로 채워가는 일이란 걸 생활로 옮겨가는 중인가 보다.      


  채운다고 하면 , 배꼽시계에 충실하게 사는 것, 물적 색적 욕망을 원대로 취하는 하위 개념이 먼저 떠오른다. 속가의 생활자들은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배안의 허기는 물론 정신적 허기에도 시달린다. 승가 생활을 한다고 이런저런 허기가 다 지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림 없이 번뇌는 바람인 양 불어온다.


  몽탄의 암자에서 수행한 적이 있다. 사실 엄마의 권유로 이뤄졌기 때문에 자발적 행위는 아니었다. 수행이라기보다는 수행을 빙자한 기숙 기도 같은 것이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40일 정도 머물렀다. 가사 대신 잿빛으로 상하 장식 없이 주머니만 달린 의복을 두벌 지어 입었다. 절 밥은 천연 재료의 맛 내기를 추구하여 소박한 맛을 유지하였다. 요것 저것 장식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것 자체가 번뇌의 시작일 것이다. 재색 옷을 입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 작은 탑을 돌고 관음전에 들어 절을 올렸다. 주지스님이 경을 읽는 동안 나는 나쁜 살을 쫓아낼 마음으로 기도를 한 것 같다. 


  관음전 아래 행처에는 고시 공부를 하러 온 사람이 몇 있었다. 사근사근 붙임성 좋은 공양주 보살 덕에 밥 공양시간이 즐거웠다. 서울서 내려왔다고 스님과 고시 준비생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었다. 한 달 이상을 한 곳에 기거하며 밥을 같이 먹는 식구가 된 것만으로 불가의 연기설에 힘이 실렸다. 서로 통 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서울서 온 처자라는 소개는 스님이 먼저 하셨다.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인사하며 살짝 웃었다. 검은색 두툼한 뿔테 안경 너머의 청년과 너 댓살 선배가 되어 보이는 두 남자가 눈에 띄었다. 청년은 별 말없이 밥을 먹었다. 반찬을 집으며 곁눈으로 살펴본 청년의 생김새가 미남은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적인 분위기가 풍겨 인상도 깔끔하였다. 하루 세 번 그들과 규칙적으로 밥상을 마주했다. 


  그것이 사심의 불을 지폈다. 그 청년에게 눈길이 갔다. 물론 그는 날씨나 그날의 반찬 등에 대한 일상적 대화 외에는 군말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해 째 관음사에서 머무는 탓에 절의 일상에 익숙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낯선 암자에 여행을 온 듯 나는 그때 야릇한 설렘으로 수행생활을 한 것 같다. 밥시간을 기다리며 지낸 40일간의 기도수행이 지겹지 않게 지나갔다. 기도가 끝나갈 무렵 남동생과 엄마가 암자에 다니러 왔다. 나에게 승복 같은 옷 때문인지 제법 행자 티가 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지난해 한 달간 암자에 내려와 머물렀던 남동생이 그 청년과 친한 사이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짧은 설렘의 끝이 허망하게 끝난 기억이다. 잿밥에 관심을 둔 엉터리 수행 경험담이다. 기도도 수행도 성찰의 바람이 불어와야 원을 이룬다. 행선이든 참선이든 선바람과 제대로 바람이 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돌다리 건너서 작은 숲을 지나는 스님들의 어깨 위로 봄바람이 목마를 탄다. 스님들은 발 닿은 둔덕에서 잠시 쉬어갈 것이다. 선방에서 덜어낸 만큼의 번민과 소망한 만큼의 덕행으로 보리 패는 들판에서 보리 바람과 진짜 바람이 날 것이다. 선바람 난 스님의 장삼 자락에 초록 물이 든다. 스님들은 들판에서 보리 바람과 해후하며 비워낸 속의 허기를 채운다. 엷어진 속세 생각 다음 하안거까지 다시 채워질 터이니, 모쪼록 빈 속 보리 바람으로 그득 채워 가시라. 인생이란 지우고 또 지우는 인연으로 남겨진 자국이란 것쯤 도통하셨을 터이니 부디 선禪 하시라고 등 떠밀며 본다. 


  구원의 도피처를 옮겨 다니는 시절의 아픔이 스님의 어깨에 딸려간다. 육신의 그을음이 연기로 날아오르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수많은 중생의 영혼을 구하러 내딛는 그대들의 발 길이여. 옮기는 걸음걸음 새 풀옷에 보리 빛깔 가득 차소서. 스님들의 짊어진 바랑이 훌쭉하다. 동안거가 별건가 안거란 말 뜻대로 편하게 살면 되는 거지. 나는 천천히 신문을 넘기며 부럼을 깬다. 


  (참고)    

* 보리 뜻 하나: 한해살이 곡물

* 보리 뜻 둘: 불교 正覺의 지혜, 지혜를 얻기 위해 닦는 道          

이전 28화 바게트와 할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