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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Dec 02. 2022

삐라 소녀

  임진강 나루터에서 강 언덕을 올려다보면 허름한 소금창고가 보인다.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빛바래 있는 창고 벽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어릴 때  그려대던 반공 포스터의 주제였고, 아직도 요원한 민족의 소원이다. 옛이야기처럼 등굣길, 산속에 뭉텅이로 뿌려져 있던 삐라가 떠오른다. 불온 삐라를 몰래 줍던 소녀의 두려움이 쿵쾅쿵쾅 의성어로 변이 되어 현실이 된다. 


 이내 눈빛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간첩에게 쫓기듯 불안하던 과거와 조우한다. 

그때는 세상에서 간첩이 제일 무섭고 나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간첩 드라마 <야간 비행>은 여름밤을 오싹하게 만들어주면서 국민 드라마가 되어갔다. 커가면서 나는 멀쩡한 지인들이 어느 한순간에 간첩으로 낙인찍히는 일을 선거 때마다 접하였다. 간첩 사건은 묘하게 나라의 혼란기에 포착되는 단골 뉴스였다. 이중간첩 사건의 주인공 이수근은, 소녀들의 고무줄놀이에 노랫말로 끼어들 정도였다. 그 노랫말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 사이에 서동요처럼 퍼져 나갔고, 비탈진 길에서 고무줄놀이할 때 새끼줄이 땅을 치며 포물선을 그을 때마다, 반원 안에서 그 소리는 맴돌았다. 


 삐라 소녀는 학군이 다른 지역으로 통학을 했기 때문에 늘 혼자였다. 

신림동에서 용산으로 통학을 하려면 산 고개를 하나 넘어, 버스 종점인 신림극장 앞에서 시내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산길에서 소녀는 삐라를 뭉텅이로 만난 것이다.

 여기저기 널려진 삐라를 줍다가 지각을 한 적도 있었다. 삐라 때문에 지각은 용서가 되었고, 삐라 수만큼  내 상장 카드는 늘어갔다. 그런 것을 보거나 발견하면 어른이나 선생님께 신속히 알려야 하는 것은, 알림장의 중요한 문구였다. 나는 그것을 주워서 자주 학교에 가져갔기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삐라 소녀로 기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삐라를 주워 담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목 뒷덜미를 낚아챌 치 모르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가느다란 목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산속의 정적은 오히려 나를 더 숨죽이게 하였다. 내 호흡에 내가 놀라기도 하였다. 삐라를 가방 속에 깊숙이 넣을 때 소녀는 가슴을 태웠다. 붉은 삐라의 문구를 의식하며 표어를 짓던 시절이 되살아난다. 왜 유독 소녀에게만 삐라가 자주 보였을까! 한강 둑 밑 동네에 살다가 갑자기 철거민으로 전락하여 산허리를 자른 신림동에 정착하게 된 것인데, 그 주변이 온통 산이었다. 외등 하나 없는 산동네에 밤이 오면 문 밖을 나가기가 두려웠다.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다가 공비들의 손에 무참히 숨져간 또래 소년의 애국심은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공포로 내 몸을 전율시켰다. 


 학교 행사 때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읊조렸던 돌림노래의 기억도 새롭다.  세상에서 간첩이 제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다. 사회는 간첩 색출에 대한 구호와 표어가 공공장소에 난무했다. 신림동에서 용산에 있는 학교로 통학을 하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는데, 나는 그 산길에서 삐라를 많이 발견하였다.


  반공교육과 정신교육이 엄격하게 시행되던 때여서 장학사가 학교에 시찰 나오는 날은 비상이 걸렸다.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떠든 일도 없이 우리는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갔다. 큰 손님의 방문에 우리까지 덩달아 뒤숭숭해지는 것이다. 얼어 곱은 손으로 마룻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른 애들은 유리창을 박박 닦아냈다. 그 시절에는 장학사가 교장선생님보다 몇 배나 무섭고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나라에서는 국민교육 헌장이라는 것을 공표하였다. 교육 방침으로 하달되어 학생들에게 모두 외우도록 가르쳤다. 학생들이 잘 외우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장학사가 학교 순시를 하곤 했다. 그들은 교장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 들어와서 아무나 지목하여 그 헌장을 외우게 시켰다.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에 묘사된 교실 분위기랄까, 교실 안은 차갑도록 조용했다. 아멜 선생님께 지목당한 프란츠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국민교육 헌장을 외웠고, 담임선생님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러나 엄숙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불온한 압박감과 긴장감으로 나의 몸은 얼어붙었다. 선생님은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낱낱이 잘 욀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셨을 것이다. 그 헌장의 첫대목은 지금도 입에서 술술 나올 정도이다. 


  몇 해 전의 무자년 정월, 은발이 성성한 칠십 대 노장 미국 음악가의 지휘 아래, 아리랑이 평양에 울려 퍼졌다. 세월이 많이 변한 것이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은 세계의 뉴스거리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적시며 세계 곳곳에 분단의 아픔을 전했다. 서로의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한민족의 땀과 노력은 온 땅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단절의 상처가 벌여 놓은 시간이 길고, 각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내 나라 내 땅이 서로의 이녁(異域)이 되어 동족의 피가 갈린 데는 해방 때부터 우리를 부추겨온 부자 나라와의 의도된 관계 때문이란 생각을 아직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든든한 우방으로 있어야만 하지 않은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통일에 한 발작 다가서기 위해 정상들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회담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삭여지지 않는 이산가족의 애통함은 여전하다. 한 통인 나라를 제3 국의 편의대로 가라 놓는데 앞장선 나라가 우방이라는 따뜻한 외투를 우리에게 입혀 줬다. 그 옷은 너무나 따뜻하여 벗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그 외투 값을 제대로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그 나라에서 음악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했던 것이다. 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메시지로 쓰일 만한 도구라는 듯이. 이 센세이션을 두고 경직된 두 나라의 감정을 음악으로 이완해보려는 시도라고 그 당시 언론은 다투어 긍정적인 평가를 냈었다.


  그때 음악 퍼포먼스로 남과 북의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육십여 년 동안 엄격하게 경계선을 긋고 살았어도 한반도 땅 속 물길은 한 길로 흐르고 있었나 보다. 봄의 전령사인 복수초가 두꺼운 낙엽이불을 들추고 노랗게 얼굴을 내밀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돋아난 봄꽃을 보며 경건하게 옷깃을 여민다. 오케스트라 선율이 凍土에 울려 퍼질 때 희망이 봄바람을 탔을 것이다. 입춘이 지난 정월이기에 메아리쳐진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아름다운 나라(美國)의 진정한 노랫소리로 필하모니 되었길 지금도 간절히 바라본다.  이완이 절실해진 시기라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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