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me Dec 01. 2022

바게트와 할머니


 가을장마가 시작된 아침이다. 전철 안은 접힌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습하다. 비 젖은 우산이 더해진 차내는 평소보다 비좁아 나와 타자의 습기가 물색없이 엉겨 붙는다. 

  큰 배낭과 두툼한 겨울 모자를 쓴 할머니가 허청거리며 들어와 노약자석에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한 손에는 접힌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대형 쓰레기봉투를 들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스무 개 남짓한 바게트가 비좁게 세워져 담겨있다. 할머니는 손에 들린 우산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 젖은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몰아쉰다. 배낭을 멘 채 빵 봉투에 비가 들칠세라 움켜쥐고, 빗길을 헤쳐 지하철을 타러 오는 길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무릎 앞에 놓인 바게트 담긴 비닐봉지가 넘어질까 봐 힘을 주는지, 검버섯 피어난 쭈글쭈글한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진다. 

  자기 몸 하나 추스르는 일도 만만찮아 보이는 팔순의 할머니는 저 많은 바게트를 이 빗길에 어디로 가져가는 걸까. 빵은 대체 어디서 구해서 이 아침에 누구에게 갖다 주려는 것일까. 할머니의 주름진 살갗은 검버섯으로 가득해 윤기 없는 바게트의 밑바닥처럼 거칠다. 옷, 배낭, 모자, 신발, 우산, 등 할머니가 지닌 모든 것이 어스름 저녁 빛이다. 몰아쉬는 숨소리는 석양의 바람 소리 같다. 눈빛에는 애달픈 고요와 또래 노인의 불안이 교차하고 있다.

  지상으로 타오른 전철이 한강을 건너고 있다. 차창 밖으로는 빗발이 거세게 사선을 그으며 강 풍경을 문질러댄다. 창가에 얼룩져 내리는 빗물처럼 인생의 나락에서 쏟아낸 고된 눈물들이 공중으로 증발했다가 빗물로 돌아오는 것일까. 비로 가득한 바깥세상은 회색빛으로 출렁이며 빗살로 흘러가고, 기차 안의 불안한 눈빛들은 서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할머니의 작은 체구에서 나는 숨소리가 비 젖은 차창에 슬픈 언어를 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른 시간은 순간이었다. 출렁이는 강물 빛을 감추고 전철은 다시 어둔 굴속으로 내달린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 

  봉투를 보니 바게트를 빵집에서 사가는 것 같진 않았다. 양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푸드 뱅크에서 얻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식량이 될 음식을 쓰레기봉투에 담긴 것이 맘에 걸렸다. 할머니가 단단한 바게트를 즐길 리가 만무하고, 어쩌면 저 빵이 바게트(baguette)라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는 연세 아닌가. 아무튼 단단한 바게트와 할머니는 그리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할머니는 바쁜 이 아침시간에 많은 바게트를 누구에게 전하려고 저리 소중하게 챙기는 것일까.

  마늘소스와 파슬리가 송송 뿌려지지도 않은 맨살의 바게트에는 윤기도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바게트 봉투를 꼭 움켜쥐고 있다. 할머니의 바게트는 어쩌면 코로나로 돈벌이를 잃은 아들이나 손자에게, 혹은 허기진 이웃에게 몇 일간의 귀한 식량이 되어줄지 모른다. 보리차 한 잔과 곁들여 따스한 채움이 되어 주리라. 

  비록 쓰레기봉투에 담긴 바게트이지만 그것은 프랑스의 로망이 깃든 빵이다. 거칠고 딱딱한 겉껍질을 뜯어서 커피에 찍어 먹는 낭만도 있다. 뜯어먹는 즐거움, 질깃한 속살과 거친 껍질을 같이 씹는 맛의 조화는 달지 않은 빵의 우직한 매력이다. 톱날 달린 빵 칼로 납작납작 썰어서 생크림을 얹어 먹던 바게트, 고소하고도 담백한 맛은 잊히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전까지만 해도 신분에 따라먹을 수 있는 빵의 색깔과 종류가 엄격히 달랐다. 바게트의 역사를 돌아보면 입맛이 고소하지만은 않다. 그 시절 밀가루와 소금이 귀하던 시대여서 귀족과 시민계급들만 밀가루 함량이 많은 흰색의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반면에 농부들은 톱밥, 진흙, 도토리, 나무껍질 등을 넣어 만든 검은 빵, 블랙 바게트만을 먹어야 했다. 흑백의 차별이 빵에도 여실했던 것이다. 농노들은 그 차별을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게 윤리에 맞는 일이라고 당연시하였다. 그것을 어기는 것이 오히려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팽배하였으니, 비윤리적인 관습에 따르는 집단적 사고의 견고함이 얼마나 사회적 병패를 양산하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의회가 빵의 평등권을 선포하였고 비로소 밀가루로 만든 바게트를 누구나 먹게 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빵 먹을 권리를 위해 빵의 평등권이 혁명으로 얻어진 것이다. 바게트를 먹을 때 그 의미를 곱씹을 일이다. 바게트는 다른 빵과 달리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잘 씹어야 할 경건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가 보다. 


  낙성대역 근처에 단팥빵으로 유명한 ‘장 불랑제 리’라는 빵집이 있다. 바게트의 본향 프랑스에서 15세기경 공 모양으로 반죽하는 사람을 불(boule)이라 칭하였다. 19세기에 빵의 평등권이 이뤄지면서 제빵사를 불랑제(Boulanger)로 불렀다고 한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여 지금도 파리지앵의 사랑을 받는다는 제빵사 쟝 뤽 푸조랑의 쟝을 따와 쟝 불랑제리라는 상호를 지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주인장 성씨가 장이거나. 바게트는 속살같이 부드러운 사랑과 겉껍질처럼 단단한 농노들이 꿈꾼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 부풀어 있다. 사랑과 자유를 반죽해내는 미스터 쟝 불랑제는 이 세상을 맛있게 부풀리는 인간 이스트가 아닌가.


  바게트에 깃든 할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는데 할머니가 축축한 모자를 손에 쥔 채 배낭의 지퍼를 연다. 모자를 배낭에 구겨 넣으려는 순간, 할머니 옆자리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낭 안에도 바게트가 다닥다닥 몸 붙여 한가득 들어 있었다. 배낭에서 구수한 바게트 향이 새어 나와 한순간 빗물의 비릿함을 가시 었지만 내 눈은 커진 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바게트들이 서로 부둥켜서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배낭 형태를 위태롭게 받쳐내고 있었다. 빼곡히 들어찬 전철안 사람들이 전철을 받치고나 있는 것처럼.


 할머니는 조심스레 지퍼를 닫고 무심히 차창을 응시한다. 유리창 밖으로 할머니의 숨소리가 적어 내려간 슬픈 언어들이 빗물에 스러지듯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만이 아니다. 이고 온 세월도 부리지 못한 아픔도 가을장마에 쓸려 내린다. 다행히 바게트가 무겁지 않은 빵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할머니가 바라보는 차창에 같이 눈길을 둔다. 비가 더 세차게 부딪치며 머릿속에 부유하는 언어들이 다시 유리창에 적히다가 주르르 흐른다. 가을장마가 길어질 것 같다.          

이전 27화 웃은 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