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귀향
깜빡이는 쉬리의 눈빛이 차갑다.
‘쉬리’는 영화에서 공작원의 테러 작전명으로 쓰인 물고기이다. 깨끗한 담수에만 사는 토종 물고기 쉬리는 첨예한 이념 전쟁의 작전명으로 쓰이기에는 작고 여린 생명이었다. 암수가 서로 사랑하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따라 죽는다는 열대어 ‘키싱 구라미’도 등장한다. 정치적 이념 때문에 연인끼리 총을 겨누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오브제였다.
쉬리와 키싱구라미는 느리게 수족관의 유리벽을 맴돌다가 수초 뒤에 숨곤 했다. 토종과 열대어의 동거는 이념 때문에 허락될 수 없는 적과의 동침이기도 했지만, 자유롭게 살던 계곡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몸짓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절정에서 수족관은 연인들이 서로를 겨눈 총탄에 산산이 깨져버린다. 물고기들은 물이 쏟아져 내린 날바닥에서 팔딱거려야 했다.
야릇하게도 나는 깨어진 수조를 보면서 생명의 본향인 어미의 몸속 궁전을 생각했다. 그곳은 따뜻한 물로 가득했었고, 나는 그 속을 유영하며 작은 생명으로 자랐다. 그리고 수족관이 깨지듯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궁전 밖으로 양수를 흘려버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잃어버린 물에 대한 갈증은 마음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았다가 끊임없이 그때의 양수를 찾아 몸속을 유랑한다. 물을 갈급해하는 바다 집시처럼 언젠가는 나도 물의 나라로 돌아가리라는 환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환영은 모태(母胎)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물을 잃어버린 물고기처럼 사람도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생명들이다. 생명의 원류라고 생각했던 바다는 그래서 바다 집시들의 바람처럼 끝내 찾아 나서야 할 꿈의 여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나 보다.
마침 태국의 카오락 해변에 달빛 같은 등불이 수없이 밝혀지고 있는 장면을 보게 티브이에서 보게 되었다. 쓰나미의 제물이 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 등불을 밝혀 하늘로 올려 보내는 행사였다. 해일 피해로 숨져간 사람들이 ‘영혼의 별’로 떠오르는 순간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물 위를 떠도는 영혼>이라는 방송의 일부였지만 나는 밤하늘로 떠올라 별이 되어가는 수많은 정령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켄족’이라 불리는 바다 집시들은 쓰나미가 몰아친 이후 태국 정부의 방침으로 코 라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긴급히 숲에 마련된 ‘천사마을 사람들’이란 구역에 모여 살게 되었지만, 숲은 바다 집시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살아야 해, 먹는 물까지 육지 것은 너무 뜨거워, 난, 바다로 돌아갈 테야.”
70 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집시들의 머릿속에는 푸른 물만 출렁거렸다. 비가 새지 않는 깔끔한 집도, 전기밥솥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숲 속 생활은 깨진 수족관에서 쏟아져 나와 바닥에서 팔딱이는 물고기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들의 작은 배려로 집 앞에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집시들을 위해 그 벽에 바다 풍경이 그려졌다. 파란 물빛이 흥건한 그림 속의 물고기들은 몸 색이 화려하고 지느러미를 흔들 것처럼 생생했다. 그러나 벽화 속의 물고기는 그림 바다에서 유령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외딴 숲의 바다에 갇힌 두 노인 부부는 그 벽화를 쳐다보면서 풀밭에 앉아서 섬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달려가고 싶은, 하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나라, 그곳이 어쩌면 바다 집시들이 가고자 하는 물의 나라와 닿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마치 깨져버린 수조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을 잃어버린 수조에 각자의 인생이 담기고, 삶은 잃어버린 물을 찾아가는 목마른 여정이 아닐 런지. 생명이 잉태되고 자란 엄마의 궁전이 원래는 물의 나라였다. 놀랍게도 자궁 안의 양수는 바닷물의 성분과 매우 흡사하단다. 거기에 편안히 잠기고 싶은 충동, 즉 태 안으로의 귀의(歸依)는 포유류가 갖는 본능이자, 외로움에 대한 감정이입일 터이다. 왠지 내 꿈의 원형(原型)이 바다 집시들의 꿈과 닮았다는 의식이 일렁이자, 눈앞에 바다가 출렁거리고 내 몸속에 물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맞다,
시퍼런 바다에 억수로 비가 꽂힐 때 일시에 피어나는 물 표면의 파란 소름..
그것은 물 위를 떠도는 바다 집시들의 눈물
한 밤이 지나 그 소름을 잠재운 하늘이
모두 한 통속이었다는 사실을
몇 겹의 포말을 깔면서 파도가 말한다
지평을 향해 달려드는 줄 파도의 거친 숨소리
바다의 맥박이고, 살아있는 물 집시의 외침이다
바다가 버려도 바다가 좋아 *코란 섬으로 돌아가고 싶다
*수린 섬으로 몰려난 人魚들 국적을 잃고
물속을 유랑하는 인어들의 꿈을 밀고 오는 저 거친 파도를 보면서
불쌍한 영혼들의 *원형(寃刑)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뼈도 없는 원형질막을 뚫지 못한 인생의 거스름들
날마다 사라지는 연습을 하듯
물 위를 떠돌며 고래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텅 빈 자궁을 바라보듯 빈 바다를 향한 집시들의 눈빛
수십 년을 산 겨울 갈매기 때의 눈빛에서 고래의 푸른 심장소리가 들린다
푸르게 얼어 버린 바위처럼 꿈쩍 않는 눈빛에 바닷물이 고인다
이제 시선을 바꿀 수가 없다
푸른 눈물 떨어질까 봐
바다 집시들은 해일을 몰고 온 파도를 끝내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해일은 어쩌면 문명의 이기를 탐한 우리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은 억울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집시들은 한사코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저들이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 물고기처럼 살고자 하는 순한 염원에 경외감이 든다. 그들의 귀향은 생명의 시작이었던 터로 회귀하는 생명에 대한 존엄한 의식일 것이다.
태국 정부는 바닷속을 오가며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넘나드는 그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어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국적은 중요한 의미가 되지 않았다. 국적 없이 물 위를 떠도는 영혼들은 그저 바다에서 물고기와 어울려 살기만을 원했다. 다만 휴식을 위해 물 위에 초막을 짓고, 작은 배 하나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했다. 수심이 낮아지는 썰물 때나 보름달이나 초승달이 뜨는 날 저녁에, 아내와 함께 그 배를 타고 나가서 먹을 만큼의 물고기를 잡아야겠다며 반 벌거숭이 할아버지가 배고픈 웃음을 지었다.
바다 집시 노인의 마음이 풍선이라면, 카오락 해변의 슬픈 등불처럼 두둥실 하늘로 떠오를 것이다. 우기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코 라섬으로 돌아갔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섬의 끝자락에는 모켄족을 수호하는 목신인 ‘로방’ 마저 다 뽑혀나가고 그 자리에 커다란 경고판이 나붙어 있었다.
“다시 코 라섬으로 돌아오지 마시오!”.
쓰나미보다 무서운 세상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