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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Dec 01. 2022

겨울새 발자국

 이른 새벽, 큼직큼직한 눈 그림자가 창가에 어른거렸다. 소한 추위에 방구들을 지고 누운 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노라니 이불속에서도 코끝이 시렸다. 한파와 폭설로 차량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뉴스가 눈발처럼 날아들었다. 남편은 폭설 주의보에 벌떡 몸을 세우더니 이내 낭패한 듯 도로 누워버린다. 전날 차에 스키장비를 실어놓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던 차였는데.... 폭설 주의가 내게는 낭보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비보가 되었나 보다. 

 폭풍우처럼 빠르게 몰아치던 눈발이 잠시 머뭇하여 창을 열었다. 가로수 가지마다 흰 목도리를 두른 듯 눈꽃이 피어 거리가 화사해졌다. 담장과 계단을 따라서 몇 개 안 되는 장독 위까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그 애애한 숫눈길을 밟는 기분은 겨울연가의 아리아처럼 청아하다. 그중에서도 도심 속 구중궁궐을 걷는 맛은 수려하기 그지없으리라. 고궁 근처에 사는 호사를 이때나 누리자 싶어 잔가지 옮겨 앉는 겨울새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겨울철이면 시즌권을 끊어놓고 시간만 나면 스키장으로 달려 나가는 남편이 폭설 주의보에 스키장 갈 계획을 접고 출근을 하였다. 토요일 오후, 어차피 스키장은 못 갈 것이니 창경궁이나 걷자고 남편에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전화를 걸었다. 사소한 오해로 시작해 한동안 서로 서먹했는데 뜻밖에 남편은 나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고 나선 궁궐 길, 그 길에서 세월과 오래 벗한 매화나무를 만났다. 한 자리에서 몇백 년을 살아낸 흔적으로 가지가 굵어졌고,  잘려나간 가지에는 거친 세월이 옹이로 남았다. 옹이는 상처 자국이지만 옆으로 새가지를 키워내는 그루터기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우리도 사는 동안 마음 안에 보이지 않는 옹이를 얼마나 많이 지니고 살아가는가. 남편과 나 사이에 불었던  바람처럼 쌩하게 바람이 불자, 겨울새가 알을 품듯이 옹이 위에 앉았다가 다른 나뭇가지로 포르르 날아간다.

 명전전으로 들어가는 길목, 옥천교 옆으로 앵두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다. 늘어선 앵두나무에 하얀 앵두꽃이 무수하게 피어났다. 그 무채색의 미려함에 이끌리다 보니 내 마음 안에 은밀히 화해의 초롱불이 켜진다. 남편은 설경의 상쾌함 때문인지 연신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어색해 눈밭에 눈길만 주었다. 설궁이 되어버린 명정전 앞은 새하얀 융단을 깔아 놓은 느낌이다. 복잡했던 마음이 눈밭처럼 시원해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품계석 위에는 백설기처럼 눈 방석이 깔렸다. 각 전각 위에 얹어진 기와 굴곡은 거대한 흑백 건반이 되어 설신(雪神)의 연주를 기다리는 듯하였고, 처마를 받쳐 든 추녀 끝은 활처럼 휘어져 광대한 현악기를 연상케 하였다. 궁중 제례악을 튕겨낼 듯 한 추녀 끝의 묵중한 적요가 무량 무량 백설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날 주변의 소리는 내려앉는 눈 소리를 따라  젖어 들어 나지막이 들린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눈 밟는 소리도 고요히 눈밭에 묻혔다.   

 내 결혼식 날 첫눈이 내렸다. 혼례식 날 첫눈이 오면 잘 산다는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띄우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수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남편의 팔을 살짝 끌어내려 팔짱을 끼었다. 이런 경우 남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는 어색함을 누그리려고 춥다는 말을 건네면서 최대한 둘 사이를 좁히며 걸었다. 평소보다는 다소 적극적인 내 공세에 그이의 팔뚝이 묵직하게 감겨들었다. 남편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으나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설경에 미혹한 까닭인지 몰라도 그 정도면 무뚝뚝한 그로서는 발전된 반응을 보여준 셈이다. 한동안 둘 사이를 헤살 놓던 찬바람이 이내 훈풍이 되길 바랐다.     

  천천히 걷다 보니 하얀 눈과 대비되는 까마귀밥 여름 나무의 빨간 열매가 눈 쌓인 숲에서 돋보였다. 겨울새들의 눈에 얼른 띄라고 붉은색을 하고 있다는 그 까마귀밥나무였다. 아까 날아갔던 녀석들인지 우리 앞으로 산비둘기와 까치 여남은 마리가 몰려들었다. 눈 덮인 땅 위에 머리를 맞대고 발목이 시리도록 돌아다녔다. 그중 한 녀석은 다리를 다쳤는지 뒤뚱한 걸음을 걷다가 이내 머뭇대곤 하였다. 그 녀석은 혼자 눈 쌓인 벤치로 자리를 옮겨 앉는 것 같더니만 훌쩍 일행을 떠나갔다. 포물선을 기울게 그으며 나는 것을 보니 다리를 다친 것이 분명했다. 다른 몇 놈들은 까마귀밥 열매를 물고 눈을 털어 내리며 부산스럽게 입을 오물거렸다. 아픈 놈만 외톨이로 날아갔다.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는 무심했는데 종종종 선명하게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나서야 사뭇 가슴이 짠해왔다. 성치 못한 놈의 발자국은 자국조차 애잔하게 뒤뚱거렸다. 그놈이 먹을 것을 찾느라고 눈밭을 헤치고 다닐 적에는 알은 채 못하였다. 그때 나는 따끈한 커피를 뽑으려고 동전을 찾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이 언제 뽑았는지 내게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진작 마음 써주지 못한 서운함이 눈밭에 찍힌 발자국 앞에 묶여버리고 말았다.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툼이 시작되어 마음 고름 풀지 못한 채, 속 그늘 넓혀가던 지난 한 해였다. 남편과 어긋났던 시간 동안 날아간 겨울새처럼 나는 얼마나 허둥댔던가. 허름한 마음으로 내가 허둥댔던 만큼 남편도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서먹하게 흘러들었다. 아픈 상처를 절뚝이며 삐뚤게 날아간 겨울새가 자꾸 눈에 밟혔다. 폭설 주의보 때문에 함께 한 눈길에서 남편은 내 손을 자기 주머니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처럼 조용히 걷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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