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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Nov 30. 2022

불장난의 우연, 그 혼 흘림

혼 흘림의 서사 3

<테라코타 여인들>

 문득망우리 공원에 세워진 화강암의 묘 비석검은 상판에 음각된 ’ 그의 묘 번 ‘201720’을 모스부호처럼 타전한다고아한 차림으로 동선동 아틀리에 언덕배기를 오르는 여인들의 범상치 않은 모습이 신호를 탄다. 계단에 서있던  젊은이가 그녀들을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는 장면이 뜨고여인들은 먼발치에 눈길을 둔 채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여인들이 조심스럽게 동선동 아틀리에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을 딛고 있다

  권진규 작품 속의 여인들그와 헤어진 후 몇십 년 만의 해후인가. ‘허영과 종교로 분식한’ 얼굴을 그에게 맡기고 작업실에 정물처럼 담겨 있던 기억이 새롭다오늘은 그의 아틀리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초대된 날이추억에 젖는 표정들이 사뭇 경건하다

  여인들이 속속 화실 안으로 들어간다그녀들은 자기의 이름이 적혀 있는 하얀 받침대 위에 가 앉는다. K는 여전히 비장한 눈빛을 뿜어내며 말없이 화실 입구에 자리했다여인들은 새 생명이 잉태되었던 고향 집에 와 있다는 안도감에 비로소 편안해진다미완의 편린들이 물비늘처럼 반짝이던 곳모처럼 노실爐室에 갇혀 불춤을 추던 영혼들과 마주한 채한바탕 속인들에게 원시적 마임을 펼칠 기세이다아틀리에를 부유하던 시간의 태엽이 여인들에 의해 천천히 감기고 있다. ‘2, 0, 1, 7, 2, 0’ 타전된 묘지 번호의 숫자들이 흩어지며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불장난의 우연>

 그 옛날 여인들은 예리한 K의 눈빛을 어떻게 감당하였을까절제된 눈빛으로 그녀들의 허울을 도려내고 벗겨내면서 그는 구도의 길을 거닐었다아틀리에 안에서 그녀들은 진흙인간으로 재탄생되기 위하여 K의 의지대로 거칠게 혹은 부드럽게 다뤄지면서 그 앞에 죽은 듯이 정물이 되어 갔었던 것이다그녀들의 얼굴에서 탐욕이 발견되면 거침없이 K는 욕망의 살점을 끊어내었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 내야겠다” 고 다짐하던 섬뜩하도록 과감한 그의 결의는 진흙의 유희에 그를 더욱 깊게 빠져들게 하였다작품 세계의 새로운 정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흙에 용해된  K의 예술혼은 진흙을 말려가면서 불쏘시개의 용융을 지켜보았을 것이고그의 의식은 더욱 단단히 정형화되어갔을 것이다정화된 그의 호흡으로 인간의 근원적 본질이화덕 안에서 무구한 형상으로 오롯해진다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단단해진 테라코타 형상에는 작가의 내면이 조형한 모델의 표징이 남게 된다. K의 손자국과 누흔(淚痕)이 진흙 여인들의 몸체에 필연적 우연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그것이 누구의 누흔인가누흔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다만, K는 다듬어 빚은 진흙 덩이를 뜨거운 가마에 집어넣고마저 덜어내지 못한 세속의 부스러기를 노실(爐室)에서 태워버리려고 애썼을 뿐이다

 쓸데없는 욕망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라지고 나서야테라코타 여인들은 화덕 속에서 융기되듯 좁은 어깨를 노실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슬프지만 처절하지 않게아련한 눈빛을 드러내지만 구도의 각도를 고아하게 유지하는 여인들교교한 눈빛이 공명을 일으키며 흙바람 소리를 낸다. K의 흙 놀이는 우연을 가장한 불장난을 거치면서 노실에 갇힌 여인들을 회개 승화시키는 구도적 예술행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고대의 유적 속 토우처럼 만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테라코타로 거듭나는 과정은 사람이 과보를 벗는 윤회 과정을 상기시킨다그녀들이 테라코타로 변해질 때 작가의 영혼과 교감하며 뒤엉켜 혼연일체가 될 때 불의 온도는 최고조로 상승한다그와 뜨겁게 일체 하는 순간에 습한 인간의 욕정은 재가 되고여인들은 중력 없는 공간에 부려지는 것이다

 그 순간작가는 자신의 궁극적 소명을 작품에 드러낸 것이 되고그녀들은 멸하지 않는 생을 영화롭게 부여받게 된다테라코타의 거장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불장난의 우연이라고 가볍게 일축하지만, 그것은 작가적 삶의 근원적 부활과 등가 되는 말이지 결코 우연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자신의 영혼을 투영해 가며 타자의 생애에 개입해서 인간 구원을 드러내는 치밀한 일련의 과정이 어찌 우연일 수 있겠는가.

 

<초인>

  K의 테라코타 인물상들은 놀랍도록 견고하고 엄숙한 성정을 드러낸다동시에 순수한 영혼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긴장감마저 동반한다저명한 모 미술평론가는 K의 25주기 추모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의 죽음을 서거로까지 명명하기를 서슴지 않았고한 평론가는 선의 경지와 유사한  K의 순수성을 그의 이상향이라고 헤아렸다사후물론 남겨진 사람들에 의한 해석이지만물욕에서 벗어난 자아가 진흙놀이로 순결함을 빚 어가는 작업 과정이 그가 품고자 했던 원대한 구원의 세계였던 것을 후대 미술계가 공인한 증거이다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얻기 위해 창조적 유희를 즐겼던 인간이었으며 니체가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 초인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평자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초인은 마법처럼 우리를 심연으로 초대한다예술놀이에 선택된 그의 오브제는 인간의 숨결을 부여받은 흙이었다흙은 세상 창조의 원초적 물질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는 우연을 가장하여 진흙에 영혼을 불어넣었던 것이다그 작업의 완성이 ‘테라코타’이다. 그의 불장난은 시대가 지나고 나서 값진 유물이 되어간다그가 흙에 천착했던 근원적인 이유가 이제야 날개를 달았고 청조를 꿈꾸던 그처럼 비상을 하게 된 것이다그는 미래를 꿈꾸었던 것일까그의 부장품 같은 여인들을 옆에 두고도 초인이 사뭇 그리워지는 밤이다.

 

<영희와 함께>

  첼로의 그윽한 울림이 뜰과 아틀리에를 오가며 여인들의 몸과 마음을 설레게 한다저녁 무렵 작품 영희의 실제 인물 영희 씨가 뒤늦게 아틀리에로 들어온다얼추 오십 중반을 넘어선 그녀는서슴없이 영희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비비며 자신의 분신 같은 테라코타 영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매우 반짝거리는 눈오뚝한 콧날이 작품과 흡사하다그녀의 눈길이  K의 자소상을 향하고 그의 시중을 들어주던 시절로 돌아가 감회에 젖는다영희 씨와 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밖의 여인이었던 영희가 순식간에 세속과 선계를 넘나들고 있다

 

<축제>

  음악회를 마무리하는 곡으로 타이스 명상곡이 흘러나왔다연주 소리를 엿듣고 있던 늦가을 담쟁이넝쿨들이 여름 동안 엉클렸던 자신의 그림자를 담벼락에 새기고 있다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밤이 깊어간다마음이 뻑뻑해지고 첼로의 현을 농락하며 타이스가 수도사 아 나타엘에게 유혹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벽에 일렁이던 담쟁이의 그림자가 어둠과 하나 되고 무희 타이스의 비극적 사랑은 신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다작은 음악회의 축제도 끝이 났다손님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면 아틀리에는 다시 청조의 넋이 날아들고어둠에 싸인 채 우연처럼 그들만의 축제가 다시 벌어질 것이다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지나간 지금여인들도 제자리로 떠나갈 준비를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오늘도 봄을 기다린다까막까치가 꿈의 청조(靑鳥)를 닮아 하늘로 날아 보내겠다는 것이다.” 조용한 아틀리에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윗 인용 글은 1972조선일보 [예술적 산보란에 실렸던 K 작가의 글 일부이다.

이글의 K (권진규 조각가)는 이 문장을 1972년 3월 3일에 기고하고 , 1973년 5월 4일 그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K는 현재 테라코타의 거장으로 불리는 초인 같은 천재 조각가이다.』  

는 유족의 기증으로 서울시 문화유산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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