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에서 병장까지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가족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군 생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들이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여기서 잠깐 내가 군 생활하던 1983년~1985년 군대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후 시험을 준비하다가 83년 1월 추운 겨울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반대로 여름에 입대하여 가장 추운 1월에 제대하게 되었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대전에 있는 육군통신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최전방 강원도 속초 위 고성군에 있는 22사단 본부 통신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다.
육군통신학교 통신 병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육군 통신학교 조교로 군 복무를 희망하였는데 졸업 당시 TO가 없어서 용산역에서 원주를 거쳐 강릉에 도착하여 버스로 최전방 강원도 고성군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구타가 심해서 매일 맞고 살았다. 그래서 부대를 잠깐이라도 벗어나는 포상 휴가를 가기 위해 군부대에서 실시하는 각종 대회 참여하였다. 웅변대회ㆍ음어 경연대회ㆍ주특기 경연대회 등 모든 대회마다 “일병 김록환” “상병 김록환”을 외치면서 참여하였다. 그래서 웅변대회 우승을 하여 첫 포상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전방에 있는 아들에게 면회를 가고 싶었지만, 강원도 고성군이 너무 멀기도 하고 집을 새로 신축하고 있어서 엄두를 못 내었다고 한다. 또한 두 번째 집을 지으면서 주택 건축비를 충당하느라 은행 대출을 받아서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포상 휴가는 대개 5일이었는데 집에 가는데 하루, 복귀하는데 하루 그래서 이틀이 걸린다. 강원도 고성에서 속초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서, 다시 속초 터미널에서 강릉까지 가서, 강릉에서 고속버스로 대관령 고개를 넘어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다시 광주로 가는 버스 또는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시간도 참 많이 걸리고 먼 거리였다.
아들이 휴가를 나올 때는 어머니가 정말 반가워서 처음에는 맨발로 뛰어나오셨는데, 포상 휴가를 자주 나오다 보니 나중에는 휴가 나온 아들을 보고 ‘언제 부대에 복귀 하느냐?’하고 물어보며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휴가를 나갔다가 부대 복귀할 때는 고급 빵이나 떡, 치킨 등 부대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해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포상 휴가를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나오다 보니 아들은 보고 싶은데 다시 부대로 들어갈 때는 아들 손에 무엇인가 준비해서 부대로 보내야 하니 걱정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정기휴가를 제외하고 여러 차례 포상 휴가를 받았기에 부대에서는 내가 다리미로 군복을 다리고 있으면 부대원들이 “또 휴가 가냐”고 물어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휴가 가는 동안은 집합되어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하지 않기에 정말로 마음이 편했다.
요즘 청년들은 취업하는데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 때에는 공무원 시험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합격하여 근무한 사람들이 많았다. 요즈음은 워낙 경쟁이 심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학원에서 몇 년간 공부하여 준비하는 등 시험 합격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예전에는 군에서 휴가 나가서 공무원 시험 보고 합격하여 제대하고 근무도 하는 등 취업 관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휴가 나와도 예전에 내가 군복무했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부대원들에게 나눠줄 간식 좀 가지고 가야지” 하고 물으면 손을 저으면서 요즘은 외부음식반입이 불가하고 부대 들어가서 복귀 신고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편하면서도 무엇인가 보내지 못해 미안함과 허전함이랄까?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나중에는 부대 복귀 시간에만 신경을 쓰고 다른 것은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휴가 중에 시험을 본 것처럼 아들도 세 번의 휴가를 군대 입대 전 준비한 시험의 ‘모의고사’를 보는데 사용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8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 시험을 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시험을 치른 아들을 보면 짠하기도 하면서 대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