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었다면 난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를 박여사라 부른다.
엄마는 결혼전 여고를 졸업하고 우체국에 근무 하셨다.
나름 시절에 비하면 공부를 많이 하신편에 속하셨다.
엄마가 출퇴근 하는 길목에 아빠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었고
양산을 쓰고 지나가는 엄마에게 아빠는 자꾸 돌멩이를 던졌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눈이 맞았다.
중매결혼이 난무하던 시절 무려 연애결혼 이라는 것을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 사남매가 태어 났다.
엄마는 장손인 아빠로 인해 딸 셋을 내리 낳으신 후에야 비로소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엄마는 늘 강한 분이셨다.
거침이 없었고 무었을 하든 지는법이 없었다.
어릴적부터 내성적이고 심약했던 나와는 반대의 성향을 가지신 분이었다.
집안의 내무부장관으로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나가셨고 아빠가 정년을 하시기까지
나름의 자산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공이 매우 지대 했다.
결혼해서도 엄마는 나에게 유약할 틈을 주지 않았고 여전히 강한 엄마로 남아 있었다.
그랬던 엄마가 달라진건 내가 병을 진단 받은 시점 부터 였다.
서울 병원에 엄마와 함께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던날...
(이 때까지는 2차병원에서 들었던 병이 아니길 간절히 기도 했었다)
결과를 듣고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기까지
우리는 많이 울었다.
나는 내가 불쌍해서 울었고 엄마는 딸이 불쌍해서 울었다.
엄마는 수술전에도 나에게 왔다갔다 하셨지만
수술후 회복하기까지 1년 6개월여 동안 모든 간병을 도맡아서 하셨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엄마가 아팠다면 나는 엄마가 나에게 해주셨던 만큼 과연 할 수 있었을까?
내가 힘든 투병의 시간과 재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는 늘 나를 응원하며
오롯이 내곁을 지켜 주셨다.
늦었지만...모든 것을 주신 엄마에게 깊은 애정과 감사를 보낸다.
유대 격언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실 수 없으시므로 어머니를 보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