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남 「연꽃탄」
연꽃은 석탄기에서 왔다
어둠 속에 잠자고 있던 꽃씨를 깨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이는 석가모니였다
부처의 뜻을 눈치 챈 씨앗이
잎눈 틔워 캄캄함을 밀어 올릴 때
철없는 줄기가 석탄을 너무 많이 만져
연꽃은 세상에 올 때 연꽃탄이 되었다
아버지는 연꽃탄을 배달하셨다
연꽃의 미로를 걸어가
집집마다 꽃불을 전해주셨다
명덕상회 사이다 병이 얼어터지는 겨울이 오면
바퀴 달린 연못이 통째로 골목에 부려졌다
쇠집게에 두 송이, 양손에 네 송이씩
연꽃탄을 모시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아버지는 언뜻언뜻 연탄으로 보이기도 했다
연못 하나가 다 비워지는 해거름이면
배달을 마친 아버지 몸에서 연꽃 향이 아득했다
그런 날 밤중이면 하늘가 연꽃탄 불꽃이 하도 환해서
잠자던 마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자꾸 뒤척여보는 것이었다
연꽃밥과 연탄과 아버지의 구멍을 생각하다
손을 뻗어 휘휘 저어보면
웅크린 겨울밤 너머 꽃불이 당겨진다
-유정남 「연꽃탄」전문
우리는 ‘장소’를 토대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장소’는 말하자면 ‘직접 경
험하는 의미 깊은 공간’(A.Relph 2005)을 뜻한다. 이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는 개념을 넘어 우리가 어떤 일들을 겪고 하루하루를 생활하며 살아가는 장소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추상적 의미 공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 특정한 장소로 변화되는 이 곳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아왔는지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은 결정된다. 따라서 장소는 객관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 장소를 경험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실존의 근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개인이냐 집단이냐에 따라서 혹은 경험의 깊이와 강도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또한 장소에 속한 자이냐 바라보는 자이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장소에 대한 이미지는 달리 각인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시에서 화자는 ‘연탄을 배달하는 곳’ ‘손수레’ ‘미로’ ‘명덕상회’ ‘구름언덕’ ‘잠자는 마을’ 등의 장소를 기억하며 유년시절 ‘미로’를 따라 집집마다 연탄을 배달하는 아버지 모습을 떠올린다. ‘연꽃탄’을 연꽃에 비유하고 쇠집게에 연꽃탄을 집어 얼어붙은 골목길 사이로 이를 배달하는 모습에서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연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과거의 기억에 간직된 사실은 혹한의 겨울. 얼어붙은 손으로 양 손에 검은 연탄을 든 채 작은 골목길을 바쁘게 움직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화자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사실은 현재의 시공간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된다. 연탄은 연꽃화된다 청정한 희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꽃은 시에서는 철없는 연의 씨앗이 줄기가 되고 석탄을 너무 많이 만져 부처의 인연으로 ‘연탄’에서 ‘연꽃탄’으로 환생한다. 일견 연탄과 연꽃은 언어적 측면 뿐 아니라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묘한 동질감과 차이를 지닌다. 희고 붉은 꽃을 피우고 꽃이 지고 난 후의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은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검은 연탄의 모습과 흡사하다. 여기서 환생된 연탄은 검은 색에서 시작하여 제 삶의 몫을 다 하고 나면 연분홍 빛깔을 지닌 연꽃이 되고 이는 꽃잎이 떨어지듯 부서지고 흙으로 사라진다. 연탄을 담은 리어카를 연못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 화자는 연탄을 필요로 하는 장소를 바삐 움직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꽃탄’으로 겹쳐 떠올리는 기억의 재구성과 환상을 통해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생애 순환의 묘한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시에서 언급된 이러한 장소들은 화자의 현재 속에서 수정된 과거로 다시 기억된다. 이러한 과거에서 언급된 장소들은 연탄과 불과분의 관계를 맺으며 줄곧 화자의 기억 속에서 공존하게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과 연관되어 되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현재의 삶 속에서 재저장된 아버지의 모습을 화자는 어느 먼 미래에는 또 다시 다른 모습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