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재 「산성 일기·10」

by 김지숙 작가의 집

의지로 산다

역사의 흔적이 깊어서인가

산길이 험하다

우람한 산에 갇힌 미미한 산길

삼전도의 수치가 저만치 걸어간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심히 부끄러운 것은

나만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기에

수백 년 된 행궁 앞을

걷고 또 걷는다

이만오천 명의 식량이 바닥나고

굵은 우박이 쏟아지는 가운데

임금은 맨발로 제사상 앞에 서서

울고 또 울고

성밖의 백성들이 역병에 죽어간다 하니

잠시 이마를 땅에 대기로 한다

염병은 청나라 군대에도 생겨서

돌아갈 명분을 찾고 있었나 보다

수난이 있기에 찾게 된 실력

고난을 뚫고 오르는 의지로

험한 산길 오른다

어제 같은 오늘도

-정신재 「산성 일기·10」



기억은 어떤 단서가 제공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회상(recall) 혹은 재인(recognition)으로 나뉜다 또한 의도적으로 기억하고자 한 적이 없지만 불현듯 되살아나거나 즉각적 회상을 요구하는 단어 운전시 기어 변속과 같은 숙달된 균형감각은 무의식적으로 인출되는 암묵적 기억에 해당된다

특히 재인이란 단서나 표적을 직접 보고 있는 상태에서 선택된 과거의 경험을 인출로 잡고 그 정보가 학습된 정보와의 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기억의 도출방식이다 즉 회상은 주관식 재인은 객관식 시험으로 예를 들 수 있으며 회상은 재인보다 강한 기억의 힘을 갖는다

우리는 잊고 싶었던 혹은 잊고 지내던 시간 속의 기억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과 공존한다는 점을 쉽게 인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그만 단서라도 제공되면 언제든 과거의 시간을 뚫고 현재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점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한다

위 시에서 화자는 오래된 산성을 찾아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한다 (인조실록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에 따르면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59일을 버티다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을 하게 된다 인조의 어가가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2번 행하는데 첫 번째 절은 청죄(請罪)이고 두 번째 절은 법제를 새롭게 하는 유신(維新)으로 하늘에 행한 것이며 청태종에게 절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다

후대인인 화자는 삼전도의 굴욕을 매우 부정적인 역사의 상징으로 인지하고 있으며 이 일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과 사대부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는 점도 역사교과서에서 기록된 바이다 화자는 과거의 조선으로 돌아가 삼전도의 굴욕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듯 이만오천 명의 식량이 바닥나고 ...임금은 맨발로 제사상 앞에 서 있는 울고 또 우는 고통스러운 상황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직접적으로 체험한 상황을 소환해 기억을 재현해 내는 상황과는 다르다 화자는 직접적으로 보지 못한 광경들을 한때 자신이 서 있는 시공간 속의 과거 학습과정에서 인지된 사회적 상황이 주입된 기억을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 인출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각을 더해 주관식 시험을 치듯 재현하는 재인의 과정이 특징 있게 드러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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