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어림잡기

이신강 「기억의 창고·1」

by 김지숙 작가의 집

오래된 기억 어림잡기



기억(記憶)으로 획득된 정보나 정보저장능력은 변형과 창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어떤 사실이 뇌에 저장된 후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 인출과정을 거쳐 회상에 이르게 되는데 인지심리학에서는 ‘기억’이라 하고 소모보다는 이를 도구나 연장에 비유한다 이 기억은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과정들이기에 직접 관찰할 수는 없지만 주변의 자극과 반응을 표출하는 연결 고리들을 통해 추론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며 살아가지는 못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거나 혹은 주의를 기울이는데 실패할 우려도 있다 이는 망각에 기인되며 어떤 단서가 제공된다면 회상 재인 재학습이라는 형식을 통해 재빨리 인출된다

어림잡기는 합리적 판단이 필요치 않거나 빠르게 사용하기 위해 특정 대상의 대표성 확률을 느슨하게 추정하거나 근처 지점을 산출하는 방법으로 휴리스틱(heuristics) 또는 발견법(發見法)에 가까운, 보다 빠르고 용이한 간편 추론의 방식이다

기억이란 재생과정에서 정확하게 과거의 시점으로 되돌려질 수 없으며 어림잡는 정도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현실의 상황에 맞게 추출 재구성되는 것이라 보는 정도가 적절하다 흔히 기억은 어떤 자극에 주의를 기울여 그 자극을 기억에 넣고 부호화하는 습득(aquisitio) 일정기간 유지하는 보유(retention) 활용하기 위해 자동적 능동적 과정으로 인출(retrieval)되는 세 단계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기억의 구조는 시각 촉각 후각 청각들과 같은 감각에 감지된 정보를 짧은 기간에 정확하게 기록하는 감각 기억을 비롯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단기기억 및 이를 개획하고 처리하는 체계인 작업기억 그리고 일생 동안 저장하고 인출하는 장기 기억이 있다(우현주 2010)

그 중에서도 감각을 동원하여 뇌에 기록하는 감각 기억은 단기 기억의 과정을 거쳐 언제든 꺼내 쓰는 장기 기억에 해당된다. 기억은 심상의 지각으로 변형되는데, 이는 재생되는 과정에서 온전한 기억이나 지각이 아닌 상상력을 동반한 채 유기적 통일과 재구성 작업을 거쳐 보다 구체화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억의 이미지가 지각이라는 특별성을 동반하여 새롭게 재창조되는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만큼

기억의 창고가 있다

그 중에 자주 드나드는 창고가 있고

평생 안 들어가 본 창고에

우연히 들어 갈 때가 있다

그 기억의 숲속에

웃음과 황당한 사건들

그 중에 나의 10대 이야기를 만났다

나의 인생을 당당히 살겠다는

뚜렷함이 있었고

그 때의 인생의 방향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왔음을 알았다

-이신강 「기억의 창고·1」



우리는 필요할 때 기억을 소환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재현한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실을 소환하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 그대로일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의 자유로운 해석에 기반을 둔 현재 상황에서 당시 감정이 내재화된 점을 되돌리려는 노력에 기인될 뿐이다. 이 기억의 장치는 한 때 머문, 이미 화석이 된 시간대 앞에서는 체계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으면서 어떤 판단의 기준 없이 자연스럽게 돌이켜 현실의 시공간 속에 서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시공간대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같은 내용의 기억을 소환해내지는 못한다 경험과 합리성 가치관 심상의 지각 등이 다르기 때문이며, 매시간 다르게 축적한 기억은 여러 상황과 무의식적으로 결합 적용하여 필요한 상황이 되면 빠르게 꺼내 적절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과정을 거쳐 더 이상의 필요성을 상실하면 다시 그 자리로 되돌려 보내지곤 한다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언제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일들이 마치 어둠 속의 빛처럼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시의 화자는 삶의 연륜과 기억의 창고 크기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의 ‘기억’은 오히려 추억과 동일시 된 개념으로 읽힌다

오랜 세월 살아온 삶의 족적들이 기억의 공간을 차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의 자극과 더불어 생긴 감성으로 축적된 기억들이 다시 현재의 공간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워낙 방대하여 어떤 실마리가 제공되지 않으면 쉽게 들추어 내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또한 과거의 시점에서 유효하던 것이 현재의 시점에서도 동일하게 유효하기도 하고, 전혀 쓸모없거나 또는 그저 그렇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 때의 인생의 방향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져왔다는 화자의 말에서는 ‘초지일관’하는 관점이 나타난다

이러한 마음은 누구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가질 수 없는 쉽지 않은 감정이다. 오랜 세월을 건너와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소중하거나 한결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화자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내용에 따라서 화자의 삶의 질과 방향은 결정되어 왔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시철 「이 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