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정원
기억하는 한 우리 형제자매에게 호칭은 아버지였고 단 한 번도 아빠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엄마 아버지로 부르며 자랐다 아버지는 통근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다 그래서 언제나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언제나 늘 한결같이 정해진 시간을 사셨다
아버지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였다 100평 정도의 대지에 스무 평 남짓 앉은 기와집을 제하고는 아주 안성맞춤으로 아담한 정원을 꾸미셨다 집이 남향에 대청마루가 있고 대청마루에서 내려오면 작은 단 높이로 돌로 쌓은 축담이 있었고 축담 아래로는 호박돌로 경계석을 삼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의 오른편에는 바나나나무가 오래도록 자리 잡아 있었고 겨울이면 짚으로 싸고 또 짚밖으로는 이불을 꽁꽁 사매서 맨 바깥은 비닐로 풍성하게 덮으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 결국 바나나나무는 꽤 여러 해를 열매를 맺고 또 아랫가지에서 순이 나와 자라서 열매를 열곤 하더니 결국 죽었다
이후 그 자리는 국화꽃으로 가득했는데 국화는 실국화 추국 소국 등 색깔도 꽃잎 모양 크기도 다양했다 국화의 줄기를 꺾꽂이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것을 즐기셨다 국화꽃을 정말 좋아하신 것 같다 국화 밭 뒤로는 대추나무 가 몇 그루 있었고 집에서 가장 먼 경계 부분에는 무화과나무가 심어졌다 무화과나무는 잘 자라기도 했지만 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담을 넘어간 가지에 난 것은 당연히 동네아이들의 먹거리가 되었다
정원의 가운데 부분에는 무화과나무 앞쪽으로 감나무가 있었고 감나무 앞으로는 붉은 장미꽃이 피는 나무가 몇 그루 있었고 그 가운데 맨 앞에는 모란과 작약이 자리를 잡았다 그 건너 앞 집의 축담 아래에는 채송화와 분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축담을 내겨가기 전 툇마루 양옆으로 계단씩으로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난초를 몇 분 키우셨다 풍란이며 춘란이 꽃을 잘 피웠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정원의 오른쪽으로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 안에는 연꽃이 있었고 붕어들이 꽤 많이 헤엄치고 다녔다 한 달에 한 번은 날을 잡이서 꼭 물갈이를 하시곤 했다 연못가로는 딸기를 심어 얼마나 많이 번졌는지 잎사귀를 들추면 딸기가 곳곳에서 얼굴을 쏙쏙 내밀곤 했다 연못가에는 앵두나무도 있었고 수국도 있었다
앵두나무에는 앵두가 열릴 즈음이면 언제나 커다란 송충이가 징그러운 몸뚱이로 기어 다니곤 했다 용기를 내어 앵두를 따다가 쨈을 만들곤 했다 우리 집 수국은 다른 집들과 달리 연분꽃 흰색 청색이 고르게 다 들어 있었는데 다들 신기해했고 특히 색깔이 여러 가지였는데 아버지의 나름대로 기법이 숨어 있다고 하셨다 정원은 오른쪽과 중앙 왼쪽을 나누고 그 가운데는 편편한 돌을 가져다가 길을 내셨다
정원을 지나 동쪽으로 돌면 장독간으로 오면 장독간 옆에는 접시꽃이나 봉선화 해바라기 같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성류나무 옥잠화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집의 뒤쪽으로는 도랑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그 물길은 얼마지 않아서 큰 도로가 생기고 도랑길로 물길을 돌리면서 집안으로 흐르던 도랑은 막았다 산에서 바로 내려오는 그 도랑물은 너무 깨끗해서 물이 흐르는 동안에는 아이들과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발을 담그고 소꿉놀이도 하면서 모래로 밥과 반찬을 만들기도하고 두껍아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같은 놀이를 하기도 했다
도랑 앞으로는 일부러 다치지 말라고 모래밭을 만들었고 모래밭 위로는 쇠로 만든 의자 그네가 있었다 학교에도 없던 그네가 우리 집에 있을 무렵이었으니 자연 아이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서로 타겠다고 대문만 열려 있으면 아이들이 들어와서 타는 통에 고리를 건 쇠가 너무 빨리 달아서 몇 번은 고치고 고치면서 그래도 막냇동생이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 그네를 타고 놀았다
북쪽 방향에서 도랑물이 내려오는 담장을 향해 동갑내기 친구가 살았고 서쪽 담벼락에도 동갑내기 같은 반 친구가 살았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4-5명은 기본적으로 있었던 때라 대부분이 서너 살 터울로 있었고 친구이거나 친구의 언니 오빠 동생이라서 너무도 잘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집처럼 사철 내내 꽃이 피는 집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무화과나무의 가지를 얻어다가 심기도 하고 국화가지를 꺾꽂이한 것을 가져다가 정원을 꾸미기도 했다 그래서 부모님이랑 친한 다른 친구집에 가보면 우리 집이랑 비슷한 모양으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우리 집은 자라면서 이사를 그다지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유년시절을 거의 다 보낸 내 인생의 첫 집에 대한 기억은 길고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태어나고 중학생이 되고 한참 지나서야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을 떠나게 되었다
가끔씩 지금도 그 집에 대한 꿈을 꾼다 계단이 제법 높았던 그 집의 대문이 열리고 그 집 뒷마당의 쇠의자 그네를 보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엄마가 카레를 만드는 모습을 보곤 한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어릴 적 기억 속의 사람들을 만나고 부엌마루를 열면 마루 아래에 아궁이가 있어 거기서 무언가를 만들어 주곤 하던 세 들어 살던 친구 언니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여유가 생기면 그런 집에서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마당이 넓은 집 원하는 꽃을 마음껏 키우는 집 그런 집에서 다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아버지의 정원을 나도 다시 누리며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