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미해지는 내
어릴적 추억에서
지금도 설명하야 잊을수 없는 것은
달밤 오이밭에 같이 앉아 오이를 따먹으며
나의 손을 고옥 쥐던 순이의 얼굴이었다
이밤도 달빛은 의구히 환 하노니
아해처럼 오이를 한입 물었으나
잠시 미각을 잊고
다시 추억에 잠기노라
-박화목 「오이밭」
해방공간은 많은 변화 속에서도 귀향 가족에 대한 만남이 가능하게 된다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작은 사회집단의 단위이다 하지만 혼란한 상황 속에서 가족은 보편적인 집단으로 영속적인 존재가 불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가족과의 만남을 되돌아 볼 때 진정한 만남이란 마음뿐이고 행복한 만남이란 과거에만 존재할 뿐 현실적으로 행복은 멀기만 하고 귀향은 생각 속에서 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다만 이전에 비해 다소 푸근하고 뒤돌아 볼 여유가 생긴 현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못다 한 사연을 떠올리는 아쉬움으로 일관된다 시의 화자는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는 회상의 매개로 오이를 떠올리고 뒤따라오는 순이와의 아련한 추억은 이제 그조차도 세월이 흘러 희미한 그리움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회상은 박화목의「오이밭」<부인신보>(서울, 1947.7.4)에서 찾을 수 있다 화자는 어린 시절 추억도 희미한 달밤 오이밭에 앉아 오이를 따먹으며 손을 꼭 쥐던 과거의 순이 얼굴을 떠 올린다 그녀를 떠올리는 그날 밤처럼 달빛 또한 환하고 오이도 그날처럼 한입 베어 물었건만 그날의 오이맛은 사라져버리고 추억 속에서 화자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