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
사골에 국수 말아먹던 함흥돼지국밥
전쟁통 부산에 몰려든 사람들 돼지사골 진하게 우려
큼직한 돼지고기와 밥 토렴하여
고달픔과 허기를 달래주던 피란민의 연명줄
서면시장 걷다가 골목 어귀부터 풍기는
진하고 강한 돼지사골 끓는 냄새
‘오늘은 묵자골목 돼지국밥 묵자’ 시험이 끝나고
허출한 마음들이 왁자그르르 옮기던 젊은 날
부산에는 돼지국밥을 먹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자라면서 우리 집에서는 돼지국밥을 먹어 적이 없어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디딘 내게는 음식이었다 어릴 적 친구집에 놀러 가거나 여고시절 친구들이랑 만나면 아이들과 서면 시장통에 있는 돼지 국밥집 잎을 지나곤 했다
돼지국밥은 돼지뼈와 살코기를 푹 삶아서 하얗게 우러난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는 국밥 형태의 음식인 이 돼지국밥은 부산 밀양 대구의 국밥이 유명하다 6.25 전쟁 당시 함경도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밀면과 더불어 부산에 정착한 음식이다
내가 제일 먼저 돼지국밥을 먹어본 것은 아마도 국민학교시절 친했던 친구 집에 자주 들락 대면서였나 보다 그 친구집은 그 시절 여늬 집과 다름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이랑 함께 살고 있었고 그 친구는 오빠 여럿을 둔 외동딸이었다 그 집은 딸이 귀한 집안이었고 고모는 없어도 삼촌들만 너무 수두룩 했다 삼대에 처음 낳은 딸이라고 양념딸이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내 친구가 그렇게 자랐다고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가면 항상 그 집 엄마도 우리 엄마처럼 늘 머릿수건을 쓰고 아궁이 앞에 서성거렸고 커다란 솥 안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소를 키우는 시골도 아니면서 늘 커다란 솥에 돼지뼈나 돼지머리를 삶거나 혹은 그 삶은 국물에 시래기를 넣어 대용량의 국을 끓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 엄마의 품도 역시 울 엄마만큼이나 넉넉해서 오가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아들 딸 친구든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든 삼촌 친구든 집안에 발을 들였다고 하면 놀다가 늘 밥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먹곤 했다 사실 그 집에는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정원도 책도 없었고 아기자기한 꽃들도 없었고 방방이 차지한 식구들이 그득한 장소라 달리 놀 거리는 없어 주로 마땅에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종이로 만든 인형놀이를 하곤 했다
좀 일찍 가거나 저녁에 가면 삼촌들이 그 집 할아버지 앞에서 신문을 읽어주거나 그 집 할아버지는 퉁소를 불곤 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의 존재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친구집 할아버지의 퉁소부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 대가족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먹기도 하지만 주로 할아버지와 제일 큰삼촌은 따로 상을 내고 아이들 밥상은 또 따로 내고 여자어른 삼촌들 밥상을 따로 내는 밥상들이 부엌에 가면 아주 켜켜이 세워져 있었다
뽀얀 돼지국에 파를 송송 썰어 넣어 밥을 말아 김치와 먹는 겨울점심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일들도 얼마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의 아빠가 직장을 옮기고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그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과 친구의 남자 형제만 남기고 내 친구와 그 친구의 엄마 아빠는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대문에 조등이 걸리더니 적막한 집이 되었다
나는 그 친구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친구가 없어도 가끔씩 그 집 주변을 서성거렸고 여전히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지만 커다란 가마솥은 부엌 벽에 걸려 있었고 김도 나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조용했다
이후로는 그 집을 가 본 적은 거의 없다 새로운 곳에서 너무 잘 살아가고 있던 그 친구는 아예 다시 올 생각이 없었던지 이후로 연락이 닿지 않았고 어떤 이유로 최근 연락을 한번 했지만 다정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대로 쾌활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추억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옛이야기 들은 꺼 내지 않았다 그 친구는 이미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잊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전생의 기억처럼 따뜻한 돼지국밥과 그 많던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었던 그 친구집의 대가족의 기억들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렇지만 서면 시장통의 커다란 솥을 보면 언제나 친구 엄마가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그 솥 앞에서 서성이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 그 철없던 그 시절의 날들이 전생의 일처럼 문득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