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화지산 정묘사에 소풍가던 날
사이다 김밥 삶은 계란 과자 풀어놓고
신나게 능 오르내리며 환히 웃는 짝꿍
‘울할배 묘라 미끄럼 타도된다’
덕석 깐 듯 무성한 금잔디 덮은 묘
흰빛 분홍 섞인 꽃 피는
800살 배롱나무 떨어지는 꽃잎 잡으며
남의 할배 묫등 부산스레 오르내리던
어린 날의 소풍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엊그제일처럼 눈에 선하다 지금은 그럴 수 없지만 당시만해도 정씨묘는 그 일대에서는 큰 능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이 능을 미끄럼틀마냥 타고놀아 풀이 자랄 틈이 없었다 워낙에 어린 시절 소풍조차도 저학년들은 학교주변 숲이나 갈 만큼이었으니 정묘사는 국민학교 저학년시절의 단골 소풍 장소였고 봄가을로 다니다 보니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던 내게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했던 장소였다
보물찾기도 시들할 즈음 친구하나가 묫등을 미끄럼처럼 타고 놀았다 분명 선생님이 묫등은 건들지 마라는 경고를 받고 출발하였는데 놀이터처럼 노는 친구를 멀끄러미 바라보니 그 친구 말이 울 할배 집이라 놀아도 된다며 내게도 권했다 나는 끝내 타지는 않고 그 친구가 노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고 결국 친구는 선생님께 혼이 났지만 그 당당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가끔 바람결에 전해듣는 그 친구의 소식은 여전히 또래의 친구와 다를 바 없이 나이들고 살아가는 것 같다 아마도 본인은 그 일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래도 그 소풍날은 친구의 일탈 행동때문에 심심하지 않았다
지금의 정묘사는 성지처럼 잘 관리되어 있다 무덤가의 배롱나무도 제법 굵어 예전의 그 느낌은 온데간데 없다
묫등을 타고 놀던 어릴 적 내 친구는 배롱나무처럼 예쁘게 나이가 든 화가로 살아간다 간간히 전해 듣는 그 친구의 소식처럼 정묘사를 지날 때만큼은 친구의 할아버지가 사는 곳인 것처럼 친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