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소 혹은 날라리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대한민국 군악대가 태평소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태평소 독주는 처음 듣는 것 같다 나의 폐부를 파고드는 음색이 독특하고 갈라지는 톤은 정말 처연하다 그럼에도 태평소 소리가 낯설지 않고 아주 친근하게 와닿는다
높고 날카롭게 떨리며 흩어지는 소리들이 귀에 닿는 순간 나의 몸속으로 육화 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듣고 또 듣고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어쩌면 전생에 나는 고려의 공주였나 조선의 공주였을까 아니 중국의 공주였나 왕이었나 아니면 장군이었나 그도 저도 아니면 혹 태평소를 불던 취타대였나 왜 이렇게 태평소의 음색에 대한 기시감이 강한 걸까
당장이라도 내 손안에 태평소가 있다면 쉬운 곡 아는 곡은 부를 것 같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한산 섬 달 밝은 날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는 시를 읊으며 장군이 평소 즐겨 듣던 악기 소리가 태평소가 아니었을까 이 태평소는 고려 시대에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오늘에 이르렀다 주로 제사 의례 군례악에 사용되었고 임금과 왕실의 행로를 호위할 때 행악으로 부는 악기이며 외국의 사신을 맞을 때에도 쓰인다
민간에서 쓰일 때에는 같은 악기라도 '날라리'라고 부른다. 이에는 서민의 애환이 담긴다 같은 악기일지라도 때로는 대취타와 같은 의전용 군영 음악으로, 때로는 남사당 굿패에서 농악 행악 등에서 사용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이런 다양함을 담고 있어 더 멋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같은 악기이지만 사용하는 곳에 따라서 다른 마음으로 다가온다 하루 종일 태평소 소리를 들었다 출강하던 대학 강사실 뒷문 쪽으로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던 꽹과리 소리에 질려서 우리 악기가 내는 소리에는 귀를 막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히 군악대 공연을 보게 되었고 태평소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태평소를 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고 가늘게 길게 떨리는 음색에 숨어 있는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연습하면 아리랑이나 어메이징 그레이스 정도는 잘 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돌아보면 소리는 발이 없이도 사방을 돌아다니고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불면 시끄럽다고 원성을 들을 것 같다
태평소를 들고 정동진 해변가에서 연습하면 파도 소리가 연습 소리를 덮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바닷가까지 내려가는 일도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까운 그 어느 날에는 꼭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