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안개는 얼굴을 내밀고
빛은 스스로를 찬양한다
손 내미는 자의 미소는
칼집 없는 칼,
등 뒤로 마른 불을 지핀다
친절의 무늬는
살갗보다 단단한 가면
자만의 껍질을 두른 겸손
말이 닿지 않는 속내
바닥이 보이지 않고
끝없이 가라앉는 검은 우물
허공이 갈라지는 사이
침묵은 얼굴을 감추고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판단을 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거나 청산한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만났고 깊은 사이라 하더라도 어느 한 순간 불쑥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뒤늦게 깊이 깨닫고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미 잘못된 판단으로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고 미련없이 정리할 수 있는 관계도 있다 하지만 정리할 수 있는 관계 조차도 잘못된 판단으로 쉽게 끊어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권이 걸려서도 아니고 남은 정이 있어서도 아닌데 두부모 자르듯이 딱 잘라내지 못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콩깍지가 씌인다든가 아니면 자기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 기준에서 적절하다 여기면 이유 불문하고 믿고 받아들이거나 혹은 몇 번을 겪어보다가 내치거나 판단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며 또한 이러한 판단으로 그다지 큰 해악을 당하지는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부부 관계나 가족 친지 친구 관계도 그렇다 집단에서 특정 사람과의 유대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곤란한 것은 특정 집단 안에서 특별히 어떤 사람에 대한 인식이 어떤 일을 계기로 크게 달라지는 경우에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관건에 부딪칠 때이다 이런 저런 사람이라는 판단으로 그 사람을 대했는데 어느날 문득 그 판단이 뒷통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부합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분명 바른 판단을 내리고 어떤 기준에 부합되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형편없이 함량 미달이 되어 크게 상심하는 경우도 있다 찬찬히 따져보면 대체로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주로 그 사람의 인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상대는 사람마다 앞앞에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면 직접 상황에 대면하지 않고서는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쉽지 않고 힘이 든다
늘 애매하게 판단이 서지 않아 그간 판단을 유보를 한 상대방에 대해 최근에야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처신을 잘하며 인심이 후해서 누구나가 좋아하고 자신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던 사람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릴 계기가 있었다 마치 안개가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을 느끼듯이 말이다
늘 앞장 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남의 일에 솔설선수범하여 사람들의 입살에 선한 행동들이 오르내렸던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판단이 서지 않고 나름 내가 아는 한 친절하고 신뢰할만한 선한 에코이스트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일들을 여러 번 겪으면서 에코이스트가 아니라 돈키호테의 가면을 쓴 나르시시스트이며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인격 유형이라는 심리의 밑바닥을 읽게 되었다
자라온 환경을 몰라서 내면 깊이 감추고 있어서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심한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나름대로 위한 답시고 그렇게 <너무 남을 위해서 살면 상처를 받는다>고 오지랖 넓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나의 오지랖에 그는 마음 속으로 내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 우월감에 빠져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무한으로 친절한 것이고 그로써 성취감을 맛보는 사람인데 자기 보다 나은 부분을 지닌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싫은 성격 유형을 가졌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판단을 수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이 든 만큼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똑부러지게 세상을 잘 살아 낸 사람에게 내가 정말 무슨 오지라퍼인양 판단한 것일까 그뿐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남들이 전하는 말만 믿고 어떤 사람을 평가한다거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사람의 속내는 그 행동이나 말씨로 알 수가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제부터라도 다시 생각할 일은 어떤 판단도 섣불리 내려서는 안되고 그 판단에 의거해서 조언을 하는 것은 더더구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도 안되는 사람 속은 모른다> 더니 참 사람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얄팍한 판단의 기준으로 상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행동과 말을 지켜 볼 수 밖에 겪어 보지 않고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