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 호박 하나
주인 떠난 묵정밭, 홍수 끝에 날아든 호박씨 하나가 움을 틔운다. 갈무리 없이 무심히 길을 내고, 달빛 따라 넙죽넙죽 잎도 내고, 튼실한 줄기 뻗으며 오가는 헷바람에도 꽃도 핀다.
지나는 길에 잘 있는지 눈인사만 했다. 여름비 지나고, 잎 아래에 푸른 알이 슬었다. 한여름 밤 지나면 넝쿨 따라 호박잎은 푸르고, 여름 낮. 성큼 자라는 호박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행여 손이 탈까. 멀찌감치 서서 바라봐도 그저 기쁜 이 마음에 내 것 인양 이리저리 헤아려 보고,
어느새 마음은 묵정밭 누런 호박 주인이다. 서리 내리기 전에 추수해야 하는데, 서리가 내리도록 호박 주인의 발길은 흔적 없고, 길손을 탔는지, 잘 익은 호박들은 하나씩 둘씩 사라졌다.
그러고도 한참 늦게 핀 꽃잎 끝에 끝물로 여문 주먹만 한 호박 하나 시퍼렇게 반쯤은 얼어 익지도 자라지도 않아 아무도 따가지 않는다. 춥지 않을까 데려왔더니, 삼동이 지나도 익지 않는다. 명색이 저도 호박인데, 햇빛도 받고, 이슬도 맞아야 익겠다는 심산인지, 한 계절이 다 가도록 언 초록이 그대로다.
데려온 정성을 알아준다면 저리 뻗대지만은 않을 성싶다. 누렇게 푹 익지도 못하고, 급한 성미에 끝물에 더디게 꽃을 피우고는 추운 운명에 뻗댄 푸른 나를 본다. 익을 때를 기다리며 누렇게 익어가는 나를 본다
이 시를 쓸 즈음 재개발지구 건너편 가까운 곳에 산 적이 있다 그곳은 흙더미를 파헤쳐 웅덩이가 되었다가 어느 날 보면 산더미로 바뀌는 등 몇 년간을 이리저리 파헤쳐진 땅은 변화무쌍했다
운동 삼아 공원이 되기 전의 이곳을 돌면서 환삼덩굴 등갈퀴 서양등골나물 돼지풀 단풍잎돼지풀 같은 이미 자연 생태를 위협하는 수많은 외래종 식물들을 만났다
보랏빛이 예쁜 등갈퀴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이미 함안호 가까이까지 무서운 속도로 번졌다는 소리로만 듣던 등갈퀴를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과 두렵다는 생각이 겹치기도 했다
구획정리 전이라 꽤 넓은 장소가 아직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구석구석 돌다가 하루는 모래더미에 올랐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짓다 떠난 호박밭의 호박들이 꽃을 피우고 밭을 이루어 있었다 꽤 많은 호박들이 자라서 누렇게 변해 익을 대로 익은 상태였다
누가 농사를 짓는 곳 같지는 않았지만 선뜻 그 호박들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는 겨울이 올 때까지 걷기를 계속하면서 이따금씩 그곳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박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커다란 잎 뒤에 숨어 있는 반쯤 누런 호박 하나가 남아 있었다 곧 모래를 파 해쳐져 웅덩이를 덮을 즈음이고 날도 점점 추워져서 더 이상 두다가는 얼어버려서 아무짝에도 못쓰겠다 싶어 이삭 줍는 마음으로 남아 있던 호박 하나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두고 보면서 왜 이 호박이 내게로 왔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생각이 생각을 물고 가다가 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