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한덩이 내어주고

by 김지숙 작가의 집


남개연.png 남개연


호박 한 덩이 내어주고


흰띠풀 잎맥처럼 따라가는 거친 산길 헤치고

한참을 더 걸어가면 오래 묵은 친구가 사는 초곡리다.

먼 길 찾아온 마음이 고마워 무엇이건 다 내어 주고 싶다며

선뜻 건네는 우정 한 덩이. 그 정이 따뜻해 덥석 받고는

애지중지 햇살 좋은 툇마루에 두고 보았다.

한 달을 바라보다 문득 누렁이의 아랫도리가 심상찮다

지짐 부치려 속을 가르니 그 속의 씨들은 움을 틔웠고,

굼벵이도 바글거린다.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호박 한 덩이 굼벵이에게 소롯이 내어 주었다.

저들도 새끼 키우는 일이라

호박 한 덩이 다시 덮어 묵정밭에 풀어놓았다.



오래전에 부산을 떠나 꽤 멀리 시골로 귀촌한 친구가 궁금해서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멀고 먼 타향에서 그래도 생각 이상으로 잘 적응해 살면서 농부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집은 평범한 시골집 같지 않게 넓은 뜰을 텃밭이 아니라 온통 꽃들에게 내어주고 부분 부분 잔디로 마당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어 그 성격은 거기서도 바로 눈에 드러났다

반갑게 맞은 친구와 그동안 못다 한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며 호박 고추 가지 상추들을 한 아름 안겨 받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 나중까지 남은 맷돌처럼 잘 생긴 호박을 애지중지 닦으며 친구의 얼굴인양 두고 보았다

그러고 한 달이 훌쩍 지날 무렵이었다 아랫도리를 닦으려고 드는데, 물기가 있었다 호박을 잡으니 잡은 부분은 속이 움푹 들어갔다 <어제만 해도 괜찮았는데 무슨 일이야> <상한 부분만 버리고 먹을 수 있으려나> 아쉬운 마음에 이런저런 혼자 생각을 하며 더 이상 놔둘 수 없어서 반으로 갈랐다

그랬더니 호박 속에는 정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벌레를 먹지 않은 호박씨들은 이미 발아를 하다못해 허연 줄기를 앞다투어 내어 헝클어진 실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고 벌레들은 호박살을 파먹어 살이 통통 올라 바글거리는데, 벌레를 싫어하는 나는 살짝 끔찍했다 그렇게 많은 굼벵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놀라서 뚜껑을 살짝 다시 덮고는 비닐봉지에 넣어 자주 걷는산 길 산초입의 오래 묵은 밭에 풀어놓았다

가끔씩은 걷다가 그곳에 가면 주인 없는 호박들이 길을 내고 꽃을 피운다 하지만 벌써 서리가 내리기 직전인데 얼마나 살아낼까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굼벵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굼벵이들은 살아서 호박을 빠져나갔나 보다 그리고 나비든 나방이든 그 무어라도 되어 살아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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