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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by 김지숙 작가의 집

에세이『지난 날이 내게 말했다』




고라니





펜션 앞마당은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섞여 있는 숲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 나온다 소나무 삼나무 자작나무 등이 잘 어우러져 있는 그 너머로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어 눈 만족도는 최상급이다

그런데 지난 겨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엉덩이를 내놓고 뭔가를 찾는 새끼 고라니를 봤다 새벽이면 배가 고픈지 펜션 앞마당 가까이 와서는 이리저리 탐색을 한다 왠지 작은 짐승들을 보면 그냥 안쓰럽다 보호본능이 일어난다

겨울이라 숲에는 먹을 것이 없을 것이고 어미는 어디로 가고 홀로 다니는 걸까 배가 고파서 그런가 조금 염려스러워 구덩이를 파고는 과일이며 곡물 푸성귀들을 조금 놔주고는 몇 날을 지켜봤다.

꽤 여러 날 새끼 고라니는 새벽이면 구덩이에 얼굴을 박고 푸성귀를 먹고 천천히 유유히 숲으로 간다. 참 여유 있다 이 동네는 다 그런 것 같다 물까치 어치 까치 까마귀 등도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날아다닌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있어도 그냥 자기 할일을 하는 것 같이 날기도하고 먹기도 하고 재재거리기도 한다 도시에서만 살다가 바라보는 이런 모습들을 보니 신기하다

요즘은 고라니가 보이지 않는다 숲이 제법 우거져서 고라니의 몸체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풀잎이 무성해서 굳이 민가로 나오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해서라면 더 좋겠다. 좀더 여름이 깊어 가을이 오고 서리가 내리고 무성하던 비비추가 사라지면 어디선가 좀 더 성숙한 고라니가 성큼 나타날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금정 산성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화명수목원으로 바뀐 공간이지만 그때는 허허로운 산허리는 벌판이었고 정부에서 매입해서 토지를 조성하느라 개발중이었다 지금처럼 겨울이라 나무가지는 앙상하고 간혹 열매만 달고 있는 나무 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마 산사과 열매 옆 땡감나무에 조롱조롱 열린 땡감을 따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인가 보다 고라니도 나와 같은 땡감을 목표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고라니의 딱 벌어진 입과 내 손이 거의 맞닿자 고라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달아나고 나는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넘어졌다

그 후는 거의 혼자서 산에 가지 않고 열매도 가급적 따지 않는다 고라니가 먹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야 안먹어도 먹을게 지천이지만 고라니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얼마전 뉴스에서 국립세종 수목원에서 돌아다니는 고라니 12마리를 총으로 쏴 죽인 내용을 듣고 많이 놀랐다 수목원이라면 자연은 사랑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게 목적일텐데 나무에게 해가 된다고 엽사를 고용해서 고라니를 쏴 죽였다니 정말 가보고 싶지 않을 수목원이다

물론 수목원 입장에서야 고라니가 골치거리임에는 틀림없고 천적이 없어 개체수가 불어나 골치를 썩일것은 분명하겠지만 고라니는 세게적으로는 멸종위기의 동물로 되어 있는 귀한 보호종이다

수목을 1억 이상의 손해를 봤다고 해서 총으로 쏴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라니를 포획해서 수목원 옆 동물원으로 자연스레 먹이를 주고 기르는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굳이 포획해서 기르지 않더라도 나무를 해치지 않을 만큼 먹이를 인위적으로 수목원 주뮈에 놔 두는 인정을 베풀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겨울이 되고 먹을 것이 없어 민가로 내려오는 고라니를 농작물을 해친다고 무작정 죽이는 것 보다는 철새에게 먹이를 주듯이 고라니에게도 먹이를 주는 아량을 베풀면 좋겠다

겨울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살아가기 참 어려운 계절이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지지 못한 자의 추위는 별것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의 추위를 한번 쯤은 되돌아보고 아량과 배려 그리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너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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