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지난 날이 내게 말했다』
파초
파초는 내게 좋은 추억을 안겨준 나무이다 국민학교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일이다 나무를 좋아하는 아버지께서는 파초 나무를 한 그루 구해다가 마당 한편에 심었다 그 당시는 기후가 추워서 바나나를 키운다거나 파초를 키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다
그런데 옮겨온 파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잎을 너풀너풀 흔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르고 커다란 잎을 출렁이는 모습은 어린 눈에도 처음보는 정말 신기한 장면이었다
늙은 파초잎은 가끔 잘라 마당 한구석에 버려졌다 그 넓은 잎은 소꿉놀이하는데 정말 유용하게 쓰였다 동그란 여느 잎들과 달리 길게 잘리는 파초잎은 면발이 되기도 하고 식탁 받침으로도 쓰고 때로는 김밥을 싸는 김이 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파초라는 이름이 낯설었고, 그때의 느낌들은 아직도 눈앞에 뚜렷이 남는 것은 아버지의 오랜 사랑과 정성을 먹고 파초가 열매를 맺은 때였다
파초는 마당 한쪽에 서서 겨울이 오기 전부터 이불을 둘둘 말고 밖으로 짚을 몇 번이고 둘러 싸매고 겨울을 보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그게 무슨 보물단지냐며 가벼운 질책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비닐이 없었으니 짚으로 식물들을 감싸 겨울나기를 했다
우리 집에서 파초는 정말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몇 해를 지나 국민학교 저학년이 될 무렵 파초에 꽃이 피었다 그 많은 꽃이 아버지의 화단에서 피고 지고 했지만 살짝 노르스럼한 이국적인 모습으로 파초 꽃이 피던 날 아버지의 함빡 웃음은 잊히지가 않는다 그리고는 송송 달린 꽃들이 노르스럼한 열매로 바뀌는 순간을 아버지는 자주 열심히 그 열매가 익어가는 것을 들여다보셨다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다면서 지나는 말을 하곤 했다 사실 내가 더 자주 들여다봤다 노는 틈틈이 학교를 다녀오면 파초에게 인사하다시피 친구처럼 지냈다 사실은 궁금했다 어떤 열매가 달리는지. 결국 내가 아버지보다 더 먼저 열매를 봤다 그날은 제일 먼저 아버지께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기차역까지 달려가서 퇴근길의 아버지를 기다렸다
내 손을 잡고 바쁘게 한걸음으로 달려오셔서는 마당의 파초부터 챙겨보시는데 엄마는 또 한소리를 하곤 했다 파초 그 열매 어디 가겠냐며 옷이나 갈아입고 보라는 내용이었다 나와 아버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겨울이 오기 전에 제법 바나나처럼 생긴 대여섯 개가 달렸던 열매는 저절로 떨어졌다 흐릿하지만 기억 속에서 그 맛은 밍밍한 바나나와 비슷한 맛이었다 그래 확실히 조금 밍밍했다 가끔 하야리아 부대에서 가루우유 바나나 양주와 같은 당시에는 꽤 귀한 물건들을 팔던 아주머니가 가끔 집에 들어 통조림이나 바나나 스카프 같은 당시만 해도 귀한 물건들을 팔곤 했었다 그 때 먹었던 귀한 바나나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집에서 자란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정말 요즘 말로 식물 마니아셨다 꽃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고 나무를 사랑하는 그 피를 내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나무와 풀 사이에 서 있으면 편안하다 베란다를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안으로 들여온 화분들... 정말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지금 생각하니 시를 좋아하고 가끔 시를 쓰시기도 하던 내 아버지의 마음에 김동명의 시 < 파초>가 와닿으셨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