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억여행을 추억하다

by 김지숙 작가의 집

에세이『지난날이 내게 말했다』




추억여행을 추억하다



오늘 학교 후배를 만났다. 그녀의 말이 비 오는 봄날, 낭만적인 기차여행을 계획했었는데, 잡다한 일로 무산되어 씁쓸하단다. 그 말을 들으니 몇 년 전 계획 없이 다녀온 나의 추억여행이 생각났다. 우연한 기회로 다시 만난 초등학교 시절 옛 친구와 마음이 동해 유년시절 살던 동네에 갔다. 부산이지만 그동안은 쉽게 마음을 열고 그곳으로 다가설 용기가 없었다.

동네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이 집은 누구 집'이고, '건너 집은 누가 살았던 집'이다. '저 집 히말라야 송은 여전하다.'는 둥.... 또 알고 보니 내가 살던 집이 바로 그 친구의 친정이다. 꼭 한번 그 집에 다시 가 보고 싶었는데, 대문이 열리고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살던 집은 내 생각 속에서만 존재했다. 이미 그 집은 블록조로 건물로 변해있고, 기와지붕 따뜻한 우리 집, 내 유년시절의 연못 감나무 석류나무 딸기밭 등의 추억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옆집은 옛날 그대로다. 너무 반갑고 신기하다. 잠시 오래된 과거로 들어간다. 옆집 아줌마가 큰소리로 밥 먹자고 엄마를 부르고, 감나무가 가지가 서로 뒤 엉겨 옆집 감이 우리 집으로 우리 집 감이 옆집으로 주렁주렁 넘어가 있다. 애써 자기 집으로 가지를 돌릴 생각들이 없었다. 옆집과는 사이가 꽤 좋았다. 풍성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석류 무화과 딸기 앵두 감 등으로 철마다 과일이 열려있었다.

엄마가 외출해서 우리 집 대문이 잠겨 있으면, 옆집으로 들어와 담을 넘어왔는데 우리는 그걸 담치기라고 했다 옆집 언니와 공기놀이도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옆집은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노부부만 살고 있다고 한다. 궁금했지만 막상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물어볼 용기은 나지 않는다. 과거는 그냥 과거이길 바래서일까? 바라보니, 작고 초라하다. 연신 쓰러져 내릴 것만 같은 기와며, 툇마루, 그리고 아래채까지 잘 갈무리된 텃밭, 나란히 놓여 있는 하얀 고무신들은 오히려 정겹고, 또 세월의 무상함을 눈물겹게 느끼게 한다. 그래도 여전히 따뜻함이 가슴에 와닿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날 것 같다. 감격스럽다.


자동차를 그 친구 집 앞에 세워두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동해 남부선이 지나는 작은 간이역은 도로 하나를 건너면 바로 8차선 도로를 물고 있는 도심이다. 하지만 驛舍는 아버지께서 퇴근하실 때면 과자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나기를 고대하던 유년시절의 모습 그대로이다. 기차표를 끊고 보니 가슴이 한결 평온하고 따뜻해진다.

크레용이 귀하던 시절,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가끔씩 기차 뒤꽁무니에 떨어져 있던 석필을 보석인 양 주워서 시멘트 땅바닥에 그림 그리던 기억들이 난다. 기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그 기차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기차는 평소 보지 못하던 곳들을 천천히 휘돌아간다. 도로에서는 가려 보이지 않던 유년시절의 정경들이 간간히 남아 지나온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추억여행을 떠나는 우리 마음을 아는지 비가 내린다. 해운대 역을 종착지로 정하고, 돌아갈 기차표를 산다. ‘여기까지 와서 바다를 보고 가야지’ 하면서 우산을 쓰고 바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본 해운대는 예전의 모습이 아무것도 없다. 정말 없다. 곧이 변하지 않은 수평선, 파도, 갯바위를 찾아 애써 눈 맞추고 다시 해운대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파는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셨다. 마음이 참으로 포근해진다.

추억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마치 유년시절에서, 초등학교 수학여행 그리고 대학시절, 장년에 이르는 오늘을 눈 깜짝할 순간에 다녀온 느낌이다.



그리고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친구의 소식도 끊어졌다.(휴대폰 분실로 대부분의 폰번호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그 역이 궁금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여리고 다정다감한 그 친구 역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기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