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봄봄 봄봄』




여행





문을 열고 나서면

반짝이는 잎새 사이에서

길 밖의 시간을 만난다


허방을 삼키고 허공을 거스르면

아직 못 찾은 삶을 만난다

달달한 인정을 쏟아내거나

애절한 슬픔을 쓸어버리거나

훌쩍 떠나버린 소설 속 주인공같이

무심히 다가온 날들


문을 열고 나설 때면

두둥실 수평선을 떠오르는 해처럼

빛나는 시간이 집 밖에서 기다린다




여행은 꼭 길을 나서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시간을 타고 과거로 혹은 미래로 여행할 수도 있다 시간 속을 여행하는 것은 어떤 때는 과거로 어떤 때는 미래로 마음의 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속 여행은 슬픔도 기쁨도 희망도 절망도 모두 순식간에 가능하다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서 헛디딘 걸음에 들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죽도록 외롭다가 죽도록 괴롭다가 혹은 미치도록 슬프다가 억울한 마음을 지닌 삶의 무게들을 모두 다 내려놓고 되돌아오게 된다

여행은 그래서 필요하다 먼 길을 떠날 때에는 꼭 필요한 짐만을 챙긴다 가져 가지 않아도 될 것은 남기도 가져가야 할 것만 챙겨 간다 짧은 여행이나 긴 여행이나 무관하게 우리는 짐을 챙기고 길을 떠난다 여행이란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떠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떠나지는 않는다

살면서 수도 없이 여행을 떠나지만 돌아올 것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늘 챙겨가지 못한 무엇이 있나 돌아보곤 불안해 하며 뒤돌아본다 무엇을 위해 반짝이다가 무엇을 덮으려고 어둠이다가 또 무엇이 그리워서 슬픔이 되는 지는 모르지만 여행을 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고 그 생각 속에서 회환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많은 준비와 계획과 되돌아오는 길 그게 무슨 소용일까 삶 자체가 이미 여행의 과정에 놓여 있고 그 마지막 여행은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떠나야 한다 단 한번의 생애 동안 무엇을 위해 용감해야 하고 후회없이 살아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작은 창문 두드리듯 잎새마다 앉아보는 작은 새처럼 우리도 지구 안에서 작은 시간을 머리에 어깨에 이고지고 살다가 어느 길 모퉁이에 다 풀어놓고 가만히 홀로 낯선 먼길을 언제든 예기치 않게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