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봄봄봄』



공책



채우기 위해 빈몸으로 태어났다


허전한 몸을 누구에게든 맡겨

허기진 마음 아프고 힘든 삶

감정을 숨긴 어려운 시들을

채우면서 철이 든다


사람은 두발로 걷지만

손에 연필를 쥐고 걷기도 한다


별 것 없지만 날카롭고

아무 일 없지만 소중한

무방비 상태로 텅텅 빈 공허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빈공책을 좋아한다 아마도 새학기를 기다려온 이유도 늘 그래서였나 보다 줄까지도 없는 완전히 비어 있는 백옥같은 공책을 새로 사서 무엇을 쓸까 기대하는 마음. 손안에 드는 크기이면 더욱 좋다 요즘세상에 지갑도 안들고 다니는 데 핸드폰 하나면 다 해결되는데 무슨 촌스럽게 공책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공책을 보면 가지고 싶다

한때는 분방구나 노트를 파는 곳에 가면 맘에 드는 공책들을 사 모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첫장을 펼쳐 누르지 않고 다시 닫고는 또 시간이 지나고 다시 펼치는 그 설레는 마음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떤 행사가 있으면 공책을 선물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그것도 만고에 내 생각이고 내 기분이었다 여러 명 중 한 둘 정도는 대환영을 했고 나머지는 대체로 이런 짓을 왜 하냐면서 시큰둥했다 그 반응을 보고는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맘에 드는 공책을 보면 그냥 지나치치는 않는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 한권의 공책을 건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너무 많이 갖고 싶지는 않다 많이 모였다 싶으면 그 중에서도 맘에 드는 몇 권을 제하고는 어떤 이름을 붙여서도 나눔을 한다 많이 가지고 있기에는 뭐가 허기진 사람처럼 스스로 느껴져서 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책을 보면 마음이 평온하고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어쩌겠는가 고칠 수 없는 마음을 그냥 두고 즐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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