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거雨安居
가고 오는 것은 길 가운데 있지 않다.
여름비는 길 위에 머물고 길 끝은 견고한 평온에 닿아 있다.
가지런한 돌담길 중간 즈음에 활짝 열린 대문 능소화
물 흐르듯 핀 와편 굴뚝 대청에 오르면 살아있는 대들보
서까래 창호지 곱게 바른 띠살문에 고운 햇빛 속살 들여놓고
한여름 잠 못 자던 밤이면
맑은대쑥 베어다 모깃불 피우고
소반의 찐 감자 먹으며 평상에 누워
입 속으로 떨어지는 별과 놀던 밤.
돌담장 안 푸른 풀 사이로 징검다리 밟으면
비 개인 연못에는 붕어떼 연잎 위에 늘어지고
우물 옆 오동잎사귀 아래로
좁쌀풀 여주 물속새 바랭이풀 줄풀 장독대 지키는
푸른빛 돌절구 뒤 안
적막이 나지막이 수 놓인 질경이 민들레 채송화 댓잎 바람
동박새 눈동자 흔들리는 후원 정자의 다실에 앉으면,
벌레소리 그윽한 여름 햇살은 낯선 길처럼 늘어진
행복했던 그 집의 낡은 나무 그네 그 자리에 있다.
넋 놓고 들여다본 담장 너머
춘양목 가지 아래에는 그날처럼 내가 서 있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어릴 적 동무랑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갔다 골목길을 걷다가 어릴 적 살던 집과 너무도 비슷한 마당 넓은 기와집을 만났다 나는 그만 넋을 놓고 그 집 앞에 섰다 그 집은 내가 살던 집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일제 때 관사로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모습들이 꽤 여러 채 있었다
다른 집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빌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들어가 보고 싶었다 친구랑 둘이 애써 용기를 내어 벨을 누르니 안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그 당시만 해도 삼십 대 후반이었으니 그 여자는 꽤 나이가 있어 보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옛날에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집이랑 너무 비슷해서 꼭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자기도 여기서 태어나고 지금껏 살고 있다면서 어디 살았냐고 꼬치꼬치 호구 조사를 하더니 결국 동창의 큰 누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집에 자식들이 보통 대여섯은 되었으니 누구라도 말하면 국민학교 동기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큰누나의 안내로 집으로 들어오라면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남동생의 동창들이라 보여준다면서 방안이며 화장실 거실 마당 목욕탕을 보고 나왔다 마당은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기억속의 마당 만큼 넓지는 않았다 집안의 내부구조는 옛날 그대로였지만 조금씩 현대화되어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기억 속에만 있던 집이 고스란히 남아 옛 추억을 되살리는데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한참을 보다가 너무 오래 지체하기가 미안해서 고맙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다시 친구의 손을 잡고 골목길로 나섰던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