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어느 봄날의 일기』
순간
좋은 순간을 기억하고 싶지만
좋은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 속의 그 순간이 더 오래간다
마음이 사라진 순간
나이가 들지만 철이 들지 않는 순간
생각은 나는데 아무 느낌이 없는 순간
나쁜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나쁜 기억은 덮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생생하게 남는 순간이 있다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은 또 중요하지 않으면 잊게 된다 뇌의 용량이 많다면 모를까 한없이 매 순간들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게 사람이다 사람들은 좋은 순간만 기억해도 모자라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생각만큼 좋은 기억들은 그다지 없다 나쁜 기억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유사한 환경이나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떠오른다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도적으로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만나도 좋은 면만 보려고 노력하고 좋은 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가끔은 허황되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없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주지 않은 사람처럼 사람을 소외시키거나 왕따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이간질해서 사이를 벌려놓는 경우도 있다 사람 사는 일들이 어디건 다 한 가지이다 억울하다 여기기도 했지만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문제이므로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기도 하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왜 그럴까'를 지나치게 생각하기도 한다 결론은 모두가 내 맘 같지 않다 상대는 절대로 완벽한 인간도 아니고 흠결투성이다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 오히려 어린아이 보다 더 철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상대에 대한 실망감을 떨치기도 하고 기억에서 내보거나 더 좋은 기억으로 덮어 버리기도 한다
오래전에 알게 된 아이 가운데 정말 어린 아이이지만 완전히 철이 든 아이였다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아이.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 옆옆집에 살았는데, 백혈병에 걸려 미국을 오가며 치료를 받던 아이 30-4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백혈병에 걸려 그 집 식구들이 온통 그 아이에 집중하던 아이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어린 나이지만 이미 철이 너무 들었었다 생각하면 신기할 만큼 마음의 나이가 이미 칠팔십은 넘은 어른 같은 아이였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며칠을 미국에 가면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낯 모르는 사람을 만나 병원으로 가고 치료받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혼자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다가 결국은 더 자라지 못하고 세상밖으로 떠난 아이를 안다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더 어른이 되거나 덜 어른이 된다 더 어른이 된 사람은 덜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만 덜 어른이 된 사람은 나이만 먹었지 꾸준히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