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어느 봄날의 일기』



수건




뽀송뽀송 잘 마른 수건에

얼굴을 묻어 무지한 영혼을 닦는다


털어도 털리지 않던 묵은 죄

허망과 위선의 갈림길에서 물든 날들

한점 부끄럼 없는 순간들

가을하늘처럼 순수한 기쁨

가벼운 잔소리들도 박박 닦는다


반듯한 날들이 반듯하게 각진

수건처럼 접히고 그 안에서 수북이 쌓인

세월들이 차곡차곡 가지런히 모여있다




빨래는 여러 가지들로 뒤 엉겨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수건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건만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열심히 제 할 일은 하는 물건도 잘 없다 양말이나 속옷 등은 한 가지 역할만을 하지만 수건은 이곳저곳 온몸뿐만 아니라 닦을 곳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수건의 수고로움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 나만 그래야 해라고 수건이 말을 한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이니까 그게 네 역할이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사람이라면 수건 같은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문득 수건에 측은지심이 든다 그리고 주변에 그런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모임이든 그런 사람이 한 둘은 있게 마련이다 역량이 풍부해서 아는 것이 많아서 혹은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런 일을 즐긴다해도 혹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이에게 그러한 헌신과 봉사들을 당연시 여긴다면 예의가 아닐 수 있다

수건을 개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각 반듯한 수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온갖 것들을 개념치 않고 다 닦아낼 수 있는 넓은 아량을 지닌 그 품이 멋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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