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그림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어느 봄날의 일기』



지우개 그림



잘못 그린 그림도

틀린 글씨도

애매한 숫자도

지우개로 지운다


잘못한 말

섭섭한 표정

사나운 기억

아픈 말

잊지 못하는 사람

지우개로 그린다



우리는 무수한 나쁜 기억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저절로 기억되는 좋은 기억들을 함께 되새기며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제 그만 잊고 싶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아주 작은 사물이나 말들을 계기로 두더쥐 잡기게임의 두더쥐처럼 자꾸만 다시 되살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을 잊을 수 있는 계기도 있다 온전히 잊는 방법은 어떤 지우개로 무엇을 지우느냐에 달렸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틈엔가 견딜만한 아픔이 된다 하지만 그 아픔들은 시간이라는 지우개 앞에서 점점 작은 결정체가 되어 잊히지만 사라지기는 쉽지 않다

그 아픔과 슬픔을 지웠다고는 하나 결코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그럴 경우에는 그 슬픔이나 원망 아쉬움 후회 등을 유발한 마음에 직면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가 이유없이 그럴 수도 있다지만 스스로에게 답을 묻곤 한다 정말 내가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무조건 나쁜 것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마음의 지우개로 지운 상황들을 다시 따라가 보면 지우개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게 된다 마치 연필화를 너무 진하게 그려 지우려해도 연필가루가 온통 종이에 날려 지우개가 지나가면서 지운 부분만 하얗게 드러나고 곰곰히 바라보면 그게 또 다시 다른 그림이 되어 있는 것처럼

너무 많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한번에 지우개로 다 지울 수는 없다 아무리 지워도 원형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런 저런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우려는 마음을 되새기고 정말 지워야 할 부분만을 지운다면 지우개가 남긴 것은 흔적이 될 뿐일까

지우개의 용도가 지우는 것에서 남기는 것으로 바꾸어본다면 지우개가 남긴 흔적들이 또한 마음이 그린 그림이 되지는 않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