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동선

by 김지숙 작가의 집

1. 화자의 인식 코드로 읽는 여성성




멀고 외지고 척박한 땅은

가뭄에 화산재 섬을 덮었다

오백 아들 사흘을 굶었으니

한 끼라도 배불리 먹여야 쓰것는데

오늘도 나만 나무뿌리 짜 먹고

미역 고사리 쑥으로 죽을 쑤다가

주걱이 부러져 솥에 빠졌다

배고파 퍼 먹은 죽

어머니인걸 안 오백아들 영실에 모이니

한라산 나무와 풀의 곡소리

멀리서 물거품 일으키는 밀려오는 물갈퀴되어

메밀꽃이 핀 제주바다

천둥 번개 치더니 작달비가 쏟아진다

- 함동선 「설문대 할망9」 전문



대지모신(大地母神)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성립된 신으로 대지가 지닌 특성을 갖는다. 또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이자 여성성의 전형으로 생각한다.(진쿠퍼 1994) 풍요의 열쇠를 가진 대지모신이 숭배되던 구석기시대에는 여성과 남성은 평등관계를 유지하지만 가부장제로 바뀌면서 여성의 권위는 사라지고, 오랜 세월 여성은 남성권력 확립에 기여하는 형태로 남는다.

‘설문대 할망’ 신화는 제주도에 전해 내려온 1만8천여 명의 신과 관련된 전설 중 하나이다. 제주인의 삶 속에 스며 든 신들은 대부분이 여신이다 그 중에서도 ‘설문대 할망 신화’는 옥황상제의 셋째 딸로 하늘과 땅을 분리한 죄값으로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치마폭에 담아온 흙으로 한라산을 만들었고 구멍 난 치마폭에서 흘러내린 흙은 368개의 오름을 만들었고 한라산 봉우리를 떼어내어 그것을 할망이 던지자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함동선의「설문대 할망9」에서는 ‘설문대 할망 신화’를 근간으로 하여 시적 상상력을 펼쳐낸다. 이는 전형적 성처녀 신화 유형에 속한다.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왕이나 영웅의 탄생에는 이 방법이 나타난다. 성모마리아 고구려 유화 에릭토니오스의 어머니 아테나 역시도 이러한 경로로 어머니가 되어 여신이라는 최고의 권력을 갖는다.

시에서 ‘설문대 할망’은 주걱이 부러지고 솥에 빠진다. 어머니가 빠진 죽 끓인 솥인 줄도 모르는 아들들은 배고파서 죽을 맛있게 먹는다. 후에 ‘먹은 죽 어머니인걸 안 오백아들’은 어머니의 넋을 기리며 훌륭한 장군이 된다는 기존의 ‘설문대 할망’의 신화에서와 같이 시에서도 ‘설문대 할망’은 여전히 살신성인의 모성성을 토대로 죽음도 불사하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영웅을 탄생시키는 전형적인 설화양식을 보인다. 이는 이미 답습된 전통적 가치관에 의한 여성성 가운데서도 모성의 희생으로 자식을 영웅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와 유사한 맥락이다 본의든 아니든 자신의 몸을 던져 오백 아들에게 밥이 되고 그들이 장군이 된 모성은 전형적인 설화 속 모성과 동일한 희생과 헌신의 코드로 사용된 여성성이 드러난다.



강화는 추수가 끝났는데

햇밥짓는 냄새없는 연백펑야

사람이 하나 둘 오고 갈 뿐 허수아비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동쪽 끝 내 살던 집이 보인다

이때 부엌문으로 흰옷 입은 분이 움직인다

‘어머니다’는 말에

눈물이 포대경을 적신다

꿈속에 뵙던 어머니

“고향 가면 다신 떠나지 않겠습니다”

-함동선「어머니다」 일부


여성의 원형은 수호 양육 수동 보호의 의미를 지니며, 여신 선녀와 같은 인격적인 상(像,imago)을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의 원형은 조선 전기의 사회 풍토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이 시기의 여성은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자리로 규범화되어 있고, 는 소혜왕후의『내훈』(1475)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 시기는 유교적 가치관이 만연하던 시대로 여성은 자기 정체성을 잊은 채 스스로의 삶을 잘 살아내는 길이 바로 가부장제적 지배에 순응하는 길임을 진리처럼 여겨왔다 여성들이 아들을 생산하고 대를 이어야 비로소 조상의 반열에 오르고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점이 의무이자 강제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대에 이르러서 다소 변화되었지만 동등관계로 나아가기에는 지금고 여전히 수많은 걸림돌이 존재하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리라고 본다.

함동선의「어머니다」 에서 화자는 ‘부엌문으로 흰옷 입은 분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누군가가 ‘어머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꿈에서도 뵙지 못하던 어머니를 눈앞에서 만난 듯 반갑고 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존재가 ‘부엌문’ 과 연이어 생각난다는 점은 화자의 어머니는 부엌문을 오가며 자식과 가족을 위해 의식주를 책임지는 전업 주부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전형적인 가부장제적 사회상황 속에서 전형적 여성의 고단한 삶을 살아냈다는 점을 각인하게 한다.

이를 C. G.융이 언급한 '아니마'가 강한 어머니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아니마'란 영혼을 뜻하는 라틴어의 Animism에서 유래하였으며 심리학에서는 남성을 진정 사랑하고 곁에서 지켜주며 성장하도록 돕는 여성상을 의미하며 평강공주가 표상이다 어머니로서의 특성인 순수한 모성애를 지니는가하면 그가 지닌 의무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충실히 이행하는 그부분에서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탁월한 덕목을 지닌 숭고함마저 지니지만 여성 자신의 삶에 관해서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가족과 친지들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화자의 인식 코드로 읽는 여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