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님의 양산이라
아침에
물구슬로 씻고
별님의 방석이라
저녁에도
물구슬로 닦고
연지에 사는 바람
차암
땀 나겠다
보나마나
바람의 손도
연잎을 닮아
물구슬 닮아
동그랗겠다
파란
바람의 손
-선용 「바람의 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과 장소의 차이를 두고, 공간은 물리적 개념으로, 장소는 사람들의 관계가 누적적으로 개입한 곳이라고 정의를 내린다.(Henri Lefebvre 2013) 공간이 물리적 속성을 찾는다면, 장소는 삶 문화 기억 생태계 공동체와 같은 속성을 갖는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는데 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을 거부하고 측정 불가능한 것이나 체험된 것으로 이해한다.
선용의 시「바람의 손」에서는 화자가 연못에서 체험한 장소적 속성을 지닌 시공간이 나타난다. ‘연잎’을 두고 낮에는 해님의 양산으로 밤에는 별님의 방석으로 여겨 밤낮으로 공들여 닦다보니 바람의 손은 동그랗게 달았다고 여긴 점에서 바람의 손이 닿는 곳은 다름 아닌 연잎으로 생태계의 속성과 삶 등을 상징하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바람’은 우주의 호흡을 상징하며 보호의 힘을 상징한다.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한다. 또 연잎은 둥글기 때문에 완전성을 상징하며 존재의 영겁 회귀를 상징한다.(진쿠퍼 1978) 시에서는 ‘연못’이라는 공간과 ‘연잎 위’라는 특정한 장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장소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우산’과 ‘방석’의 역할에 걸맞게 이 공간에서 바람이 이들을 잘 닦는 일상적 행위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리듬 속에서 비가시적인 바람의 손도 ‘동그랗겠다’는 '우산-방석-손'의 관계가 내포된 의미를 토대로 비가시적 공간을 창조적 관계로 변형하며 ‘연못’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자각하는 인식의 변화를 추구한다. 즉, ‘연못’이라는 가시적 공간은 바람의 손이 드러나면서 비가시적 공간을 구현하고 있으며, 바람의 손은 비가시적 공간으로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충실한 매개가 된다.
라옥분 「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기다리다가 오만 것들을 다 받아들였다 어제도 오늘도 아니 어쩌면 내일까지도 기다리고 맞아주는 일에 익숙해진 삶 이름모를 하얀 생각을 심장 깊숙이 찔러 넣는 순간 한참 물세례를 받고 몇 번의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또 돌아야 하는 운명. 시곗바늘이 한 칸을 지나 또 한 칸,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향기나는 향수 흥건히 바르고 또 한 번의 몸부림으로 부르르 떨다가 멈춰서는 순간 그의 임무는 끝이 아니었다. 돌고 도는 세상 속에 또 돌고 돌아야 한다는 걸 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명상에 이르는 길은 집중과 무의식의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이는 현재 존재를 결정하는 인상을 지우고 더 심오한 존재들을 토대로 흡수하는 것이 이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의식 상태에서 명상은 생각이 순전히 그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생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형 양상들은 외적 사물에 의존하는 만큼 고통은 멈추고 형상인 존재는 자각하게 된다. 나아가 명상이 무의식(unconscious)에 이르면 사고하는 기관이 그것의 원인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즉 생각이 머무르는 대상 명상 그 자체 행위가 하나이다.(Joseph Marechal) 이는 라옥분의 시「통돌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에서 볼 수 있으며 화자가 가시적 공간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몰입하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통돌이의 임무를 생각하면서 화자는 망아(忘我) 무아(無我) 상태로 들어간다. 통돌이는 비가시적인 공간이 화자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매개가 되며 소용돌이 속을 들여다보면서 화자는 자신의 본성을 더 깊고 폭넓게 체험하려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한편 시에서 나타나는 장소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세탁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화자에게 세탁실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지니는 성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통돌이를 바라보고 이를 행하고 있다.
이로써 화자는 주어진 가시적 공간에서 벗어나 내면 세계 속으로 나아가면서 사유는 확장되어 내면의 자아와의 상호 작용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개인적 삶의 열망이나 필요 등을 세탁실이라는 가시적인 공간에서 세탁기 통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나아가 화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틈엔가 통돌이라는 가시적 공간은 사라지고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의 내면에서 나아가 무한 세계로 확장된다.
고치모양 땅콩껍질 안에서 긴 잠을 잔다
돌아누워 팔베개를 하고 구부린 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깨기 싫은 긴 잠을 잔다
셀수도 없는 수많은 사계가 지나가고, 강물이 기원전부터 버려진 황무지를 기로질러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났다가 죽어간다
거대한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 지른다
인류문화의 정점에 탄생된 컴퓨터의 소음이 시계소리보다 크게 울리며 잠을 방해할 그때였다
나는 좁은 내 고치모양 땅콩껍질 속이 우주의 본 모습이며 광활한 끝이 없는 크기의 우주이며, 오히려 껍질 밖이 허상이며 작고 제한된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땅콩 껍질을 부수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안과 밖이 없는 어떠한 사유의 차별이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비로소 감겨졌던 눈을 뜨며 나는 긴 기지개를 편다
-김석계 「초끈이론」
초끈 이론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통일하기 위해 제안된 모델로 기본 입자가 미세한 끈에서 출발한다는 이론으로, 여기서 초끈이란 1Cm의 10억분의1의 크기와 끈의 굵기는 0인 상태를 일컫는다. 나아가 우주는 우리가 느끼는 넓이 길이 높이의 3개 공간 차원과 깊이(시간)차원 외에도 6개의 차원이 똘똘 말린 채로 더 존재한다는 이론의 대략이다. 김석계의 시「초끈 이론」에서 화자가 존재하는 곳은 애초에 화자가 존재하기에는 불가능한 가시적 공간인 ‘땅콩껍질’ 안이다.
하지만 화자는 생각 속에서 그 곳으로 들어가 방해받지 않고 긴 잠을 자는 동안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주가 생성되는 순간들을 맞으며 비로소 껍질을 부수고 나오니 밖은 이미 허상이고 제한된 공간이며 안과 밖이 하나인 ‘물아일체’의 세상을 맞게 된다.
‘우주를 알려거든 가까이 있는 내 몸을 살피라’(공자)고 했고, 데모크리토스 역시 ‘인간은 소우주’라고 했다. 이유는 대우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도 원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코메니우스 역시 대우주(자연)과 소우주(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가정하여 상호연관성을 주장한다. 우주와의 관계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은 소우주로 육체는 땅, 몸의 열은 불 혈액은 물, 숨은 공기에 해당한다.(진쿠퍼 1978)
시에서 화자 역시 3개의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라는 4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우주의 차원을 경험하면서 결국 우주와 화자의 몸은 둘이 아니라는 소중함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화자는 땅콩 껍질이라는 가시적 공간을 가정한 상태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진입하여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우주를 향한 심연을 화자가 깨닫고 물아일체가 되는 양가적 사유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