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사색하는 대리석 조각같다
걸어온 길 헤아리는 갈비뼈 아래가 묵직하다
상처 난 고물의 틈새로 들락거리는 바다
휘저으며 달렸던 먼 바다의 항구의 불빛
이끼 낀 어창에 까치놀이 꽃 피운다
도요가 간호사인양 이마 짚으며 울고
-손영자 「꿈꾸는 폐선」
기든스(1995)의 시간 개념에 따르면 시간은 단순한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지속이자 제도의 지속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이는 공간 역시 사회적 상호작용의 틀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손영자의 시「꿈꾸는 폐선」에서는 여행지에서 풍경으로 바라보는 ‘폐선’인지 혹은 화폭 속의 ‘폐선’인지는 종잡을 수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폐선을 매개로 사유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 그렇게 여긴 화자는 배가 걸어 온 시간 적 흐름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폐선을 보면서 그것에 삶의 무게를 부여하는 화자의 태도는 비록 움직이지 못하는 배이지만 귀중하게 생각하고 또 움직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고 다만 아픈 것이라고 여겨 ‘도요’를 불러들여 폐선을 위로한다는 긍정적인 사고의 방향을 보여준다
인간은 거대한 우주에 비해 연약하고 한시적인 존재이므로 의지의 한계를 수긍해야 하며 특별한 장소에 놀라기보다는 그곳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 장엄함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여행이라 했다.(Alain de Botton 2002)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장소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풍경처럼 가슴 속에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러한 짧고 강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 자신의 내면적 존재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가운데 ‘폐선’의 사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은호 「고드름」
가지 끝에 매달린 꽃눈 하나
꿈을 꾸고 있기에 힘든
겨울밤을 견디고 있어요
바람이 세차게 가지를
흔들어도 나에겐
더 이상 떨어질 눈물이 없어요
살을 에는 추위가
가지를 떨며 울게 하여도
몸을 감쌀 외투는 더욱 없어요
서대문 형무소에 기댄 겨울
시간이 멈추어버렸어요
수인번호
장소는 안전을 의미하며 공간은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장소에 고착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공간이 지니는 자유를 열망하는 양가적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경험의 생물학적 토대 공간과 장소의 관계 그리고 인간 경험의 범위에서 주어진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한다.(Yi-Fu-Tuan 1999)
이은호의 시 「고드름」에서 화자는 고드름을 보면서 세찬 바람이 불고 살을 에는 겨울밤에 수인번호를 받고 추위에 떠는 죄수를 떠올린다. 고드름은 계속 변화하지만 화자의 눈에 고드름은 어떤 순간 정지한 상태로 부각되어 보일 뿐이다. 고드름은 가시적 현실 공간에서 추위에 떨며 몸을 감쌀 외투조차 없는 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아 삶의 절박함을 지닌 장소에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화자의 내면은 이미 비가시적 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앙리는 빛의 영역에서 가시적인 것과 어둠의 영역에서 가시적인 것으로 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모든 것이 가시화되는 세계 속에서의 나타남이고, 후자는 어떤 세계 안에서도 어떤 세계의 방식으로도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이 직접 느끼는 내적 느낌의 체험 방식으로 드러나는 삶을 일컫는다. 핵심은 ‘자기의 나타남이 나타남의 본질’이라고 하여 자신이 감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대상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Michel Henry 1963)는 의미이다.
시의 화자 역시 가시적인 공간 속에서 비가시적인 공간을 꿈꾸고 있다. 비록 화자는 비가시적인 공간에서 따스함을 꿈꾸지만 가시적인 현실 공간에서 화자가 느끼는 신체적 감정은 ‘겨울’ ‘추위’ ‘눈물’ 등과 같이 추위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비가시적 공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수록 화자는 고드름이라는 가시적인 사물에서 떠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화자 자신의 삶의 자세를 이입시키고 있다
구름을 잡아당겨 시린 솜이불을 만든다
홱 내던진 쭉정이가
하늘에 뿌리를 내렸다
괄호 속에 갇혀있던 구름이 울타리를 넘을 때
쏟아져 내리던 웃음이
미뤄둔 어제를 분주히 지우고 있다
박수소리 색깔을 볼 수 있는 눈 가린 술래처럼
밤이 어둠을 흔들고 있다
주머니 없는 외투를 입었던 날
두려워지던 스며드는 한기
한 발짝 내밀기 전에 뒤돌아보는 습관으로
뒤척거려보는 내일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주는 것이다
나를 채우고 있는 너를 겨우 닮기 시작했는데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이는 너
사건 없는 스토리에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터무니 없는 장면을 설정한다.
-송미선 「겨우살이」
인간의 감정이나 직관은 장소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심화시켜주는 한편, 우리의 비전 지식 등을 보다 풍부하게 한다.(Lando, 1996) 인간의 신체는 가시적이며 외재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눈앞의 대상을 인식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비가시적이고도 내재적으로 자신을 체험하며 살아간다. 송미선의「겨우살이」에서는 마치 화자가 살아가는 삶을 겨우살이의 처지에 비유하면서 그가 둥지를 튼 곳은 안락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낯선 공간인 허공이자 남의 몸 위라고 말한다.
흔히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자라며 스스로 광합성을 하기도 해서 반기생 식물로 부족한 부분을 숙주에게서 물이나 양분의 일부를 빼앗아 이용하는 기생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생목의 생리를 들어 화자는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표현한다.
겉으로 보면 겨우살이가 살아가는 공간은 가시적 공간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삶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기에 삶을 영위하기에는 불안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상대와의 적응지점을 찾게 되고, 그러한 가시적 현실 공간 내에서 상대의 배신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비가시적 공간으로 들어선 화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한다.
살아남기 위해 가시적 공간 속에서 상대방에게 접촉하지만 비가시적 공간인 내면 세계에서 홀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유에 빠져든다. 또한 짧은 순간에 느끼는 ‘기미’를 통해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면서 어느 틈엔가 노력하고 저장된 과거의 이미지들은 어떤 이해도 없이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는 허무가 자리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