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늦은 가을 신선한 일탈의 순진성

김석규· 이석근·양병호

by 김지숙 작가의 집

김석규· 이석근·양병호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은 그 모습이 유사하다. 그래서 출생 성장 죽음 재생이라는 달의 변화를 인간의 삶에 비유하기도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국면으로 인간의 일생을 나누어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과 인생이 순환성을 지니는 한편, 질서 정연한 법칙을 따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을은 우주적 물질적 정신적 비옥함을 상징하며 추수를 통한 풍요 감사 축제와 같은 긍정적인 면과 조락 쓸쓸함 생명력의 정지라는 부정적인 면의 양면적 성격을 모두 지닌다. 그래서 생을 관조하거나 삶을 통찰하는 행위또는 넉넉한 인심이나 풍요로운 결실을 의미하하기도 하며 가을을 수확이 이루어지기는 계절이라거나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다음 시들은 가을이라는 이미지를 토대로 시적 상상력이 표출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탱자나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을 아직도 기억한다

들녘엔 다시 황무의 강물이 밀려오겠고

다 식은 저녁놀을 베어먹고 한참을 우짖다 가는

그리워라. 까마귀 떼들 낙조에 물든 날개

한데 아궁이서 타고 있는 장작불빛

따뜻하게 펄럭이며 멀리멀리 달려가는데

마른 풀잎 시드는 향기를 내려놓는 땅바닥

다문다문 찍혀 있는 고양이 발자국으로

소문도 없이 적시고 가는 가을비소리

걷어 올린 소매 풀어 내리는 가을을 아직도 기억한다

-김석규 「저물무렵」전문



기억이란 과거 경험을 다시 생각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하지만 이 기억은 경험 사실을 그대로 저장하고 인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억은 단순하게 과거를 재생이나 복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적 맥락에 따라 변형․저장․인출의 과정을 거치기기 때문이다. 김석규의 시 「저물 무렵」에서 화자는 회상 속의 가을을 붉은 기운이 도는 따뜻한 색깔(박명수, 2003)로 느낀다.

흔히 계절을 표현하는 색은 자연 변화와 유관하며 이는 인간의 유전적 요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노랗게 물드는 가을’은 화자가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일부가 어떤 사물을 접하는 순간 기억 속에서 포착되고 재구성된 색이다.

‘황무’ ‘저녁놀’ ‘아궁이’ ‘장작불빛’ 등과 같은 따뜻한 사물들이 시각과 청각 혹은 후각과 시각 등이 동시에 드러나는 공감각적 심상과 더불어 그려지는 회상 속에서 화자는 스스로에게 따뜻한 말을 거는 한편 이로써 자기 삶의 원천을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이헌구 편저의 시편에서

베를레느의 가을 노래를 읽는다

뭘 몰라도 명역(名譯)같다

가을노래를 읽다가

시의 언어는 분위기의 언어라는

시인 최정석의 말을 떠올린다

시도 이쯤은 돼야 한다고

이 한편의 시를 마음에 적는다

시를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가을 바람 속에서.

-이석근 「가을 노래」전문



프랑스 상징파 베를렌느의 시「가을의 노래」에서는 낙엽을 매개로 가을에 느끼는 우수 비애 쓸쓸함을 화자 자신의 처지라 여긴다. 낙엽이나 바이얼린의 흐느낌과 같은 시청각적 요소와 더불어 내면 깊이 느끼는 고독감이 표현되는가 하면 시의 음악성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동일 제목으로 쓰인 이석근의 시 「가을 노래」는 베를렌느의 시를 감상한 형식으로 쓰였다.

시의 화자는 흔히 가을을 주제로 하는 시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감성인 고독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택해 자가한 시어에 동조하는 한편, 그의 시를 읽고난 뒤 그에 대해 화자 자신만이 느끼는 은밀한 감흥을 토대로 삼고 있다 독후 시에 해당하는 형식의 이 시는 그 삶이 기쁘고 다행으로 여기는 담대함이 나타난다. 한편의 시에서 받는 감정의 변화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안도감과 삶의 여유를 갖게 되는 보다 독창적인 방식은 긍정적인 삶이 나타내는 그만의 방식이 된다.



문득

어릴 적

순이를 만났다

코흘리개 어린 동생을 업고

멀리 당산 나무 아래 숨어

사르르

초가을 햇살같은 눈웃음을 짓던 서투른 부끄럼을 만났다.

투명해서, 맑디맑아서, 환하기만 하던

고요한

응시

그 가느다란 마음결을

-양병호「저물 무렵」일부



유년기에 형성된 인간의 양심 인지능력 사회적 태도는 성인이 된 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시기에 형성된 세계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원형이 되므로 성년이 되어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유년 시절의 경험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괴테 빌헬름마이스터)

양병호의 시「저물 무렵」에서 화자는 유년 시절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게 된다. 타국에서 만난 소녀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초가을 햇살같은 눈웃음을 짓던 순이를 떠올린다. 그러한 추억에 잠겨든 화자의 모습은 '서툰 부끄럼'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간의 여러 기억 중 ‘일화적 기억’(Tulving & Squire 1994)이란 개인이 경험한 각종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일컫는다. 이 기억은 지속적으로 뇌에 쌓이므로 앞선 기억들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러한 기억은 너무나 사소하여 오래 기억되지 않거나 아예 기억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복된 사소한 일들은 기억허지 못하기도 하지만 아주 특별한 일들은 오래 기억하고 좋은 기억보다도 나쁜 기억 억울한 기억들은 더 오래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특별히 좋은 기억이 다른 기억에 비해 비교적 자주 인출 연습이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반복 학습 효과가 일어나므로 이는 다른 기억들에 비해 비교적 더 오래 기억이 되기도 한다. 시의 화자의 회상은 일화적 기억에 해당되며 화자의 기억 속에 순이는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긍정적 기억으로 성인으로 성장한 후인 현재의 화자의 삶에 위안이 되는가 하면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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