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가난한 가을 냄새 솔솔 익어가는 뜨락 저편으로
속눈썹이 긴 소년 하나
자전거바퀴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다.
붉은 감이 도레미솔로 층층이 매달리는 가지 사이로
소년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고 싶었는데.
감나무는 이명 속에 손을 넣어 소년의 실루엣과
가을 감나무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펴 놓는다.
빛의 각도로 내려앉은 바람이
데칼코마니 식으로 가을 그림 한 장을 완성해 놓았다
-감나무가 서 있는 풍경 - 한컷
-박명자 「데칼코마니」일부
데칼코마니는 화가인 오스카 도밍게즈가 종이 위에 그림 물감을 바르고 두 겹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안착시켜 떼어내는 그림기법이다 박명자의 시「데칼코마니」에서는 ‘가을 감나무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펴 놓는’ 표현기법에서 데칼코마니 기법을 시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차용한다.
시에서 화자는 가을 감나무를 중심으로 접었다가 펼치자 엉긴 물감처럼 명확하지 않은 추상화와 같은 내용으로 표현된다. 화자가 느끼는 한 면은 현재 속에서 화자는 감나무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이르는 속 깊은 성찰을 하는 상황으로 포착되고, 다른 한 면은 감나무가 서 있는 유년 시절의 속눈썹이 긴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추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또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하지만 데칼코마니의 그림 밖에 서 있는 현실 속의 화자에게 이미 감나무가 있는 풍경은 서로 다른 두 면이 모두 풍경이라는 점을 감지한다. 데칼코마니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 밖에 서 있는 화자 자신은 감나무라는 회상과 현실을 가르는 그림 속에서 뚝 떨어져 화자가 바라본 현실과 회상에서 거리를 둔 채 현실과 과거를 두 편의 그림을 보듯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밤톨이 옷을 벗는다고 일러라 댕댕이 덩굴이 엉큼한 손을 뻗는다고 일러라 알몸 그냥 푸석 내려앉는 적막과 순수, 시린 하늘이 이불 덮어주더라고 일러라 해 뜨는 쪽인지 잠자리가 이따금 날아다닌다고 일러라
생명보험 봉투를 옆구리에 낀 바람. 밤톨 숨소리에 귀를 대고 있는 엉큼한 미적거림을 누가 보았다 저녁 숨소리가 들리곤 했다.
-유병근 「가을산막」전문
영국의 시인 존 던은 ‘가을의 우아함’을 최고로 여겼다. 하지만 수확과 결실의 향연을 노래하는 가을은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식물이 더 이상의 생장하는 것을 막고 성장의 절도를 조절하는 계절이 되기도 하다. 유병근의 시「가을산막」에서 화자는 지복(至福 kief)이라는 부동의 만족 상태에 근접해 있다.
산막에 누워 밤톨 댕댕이 덩굴이 가을 채비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는 화자는 조용하면서도 어떤 규제나 방해도 없는 자유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그것을 맘껏 누리는 만족스러운 시공간 속에 놓여 있다.
어떤 세속적인 것도 인식하지 않은 채 ‘산막’이라는 화자만의 공간에서 누리는 무시간적 자유로움이 나타난다. 바람의 숨소리도 듣게 되는 화자의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이미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는가 하면 스스로는 내면적 현실로 깊이 몰입하고 있다.
대지 끝에 매달린 초록이 힘겹다
그 가벼움이 뼈마디에서도 세포가 분열되고
여름내 달궈진 울음 사이로 진통이 시작된다.
자고나면 수북이 쌓이는 말들
아무것도 되어주지 못하는 것들이 내게 올 것이다
이 계절은 금지된 표지판 앞에서
가장 쉬운 일 하나 던져 놓고
늘 제 몸처럼 나를 쓰다 버린다. 인적 없는 곳으로 자주 나를 불러내는 바람
그 길에서
떠나가고 있는 것들을 만난다
들꽃 같은 짐을 지고
-윤지영 「진통제」일부
초록은 '들판''비옥'함을 상징한다. 또한 적색이 의미하는 동화(同化) 능동 집중에서 청색이 의미하는 이화(異化) 수동 쇠약 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놓인 색이 바로 초록색이다. 희망 재생 등과 같은 긍정적인 면을 의미하지만 인생무상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뜻한다.(이승훈 1995)
윤지영의 시「진통제」에서 화자의 시선은 대지 끝에 매달린 초록에 향해 있다. 그리고 그 초록은 자연환경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존재로 진통을 겪으며 서서히 사라진다. 이 점은 화자 자신이 주변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으로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초록의 존재가 어느새 아무 것도 아닌 말처럼 수북이 쌓이고 버려지는 존재로 전락하는데 화자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 여긴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물들은 마치 쏟아낸 ‘말’이 버려진 ‘낙엽’이라는 상관물로 대처된 점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초록의 사라짐에 ‘허망’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자는 ‘가벼움’ ‘진통’ ‘울음’ ‘쌓이는 말’ 등과 같은 감각적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묘사를 하면서 화자의 존재를 그 바람에 싣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