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관·손영자·박경용·최종철

by 김지숙 작가의 집

세 번째 유형은 화자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과거사에 투입되고 일체된다. 우리는 상처, 감정, 생각들로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한다. 따라서 화자의 지닌 존재감이 시공간을 이동하지만 소리 없이 강렬하게 와 닿는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러한 소리 없는 외침이 허공을 넘나들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 현재의 빈 감각의 공간을 채워내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힘을 얻게 된다.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당신과 나 마을 뒷산 여우굴에서 만나

열세살 첫정 풋바심 했던 그날을

소꼽친구였다가

무예 쌍벽 이룬 맛수였다가

이승의 도반이 된

하늘이 홀맺어 준 질긴 궃은 연분이 고맙지 않나요

-이병관 「수로에게」일부


내 천생의 배필

배에서 처음 내린 이곳에

그대와 나의 옷자락이 서로 스치었도다

내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그대 곁에 뼈를 묻으리라

타고 온 돌배 엎어

바위섬으로 만들리라.

-손영자「망산도의 노래」일부



마침내 용녀의 측근들이 없는 틈을 타서 임금님에게 은밀히 간한다. 계림의 정세를 보도 드리고 국정 수습과 대비책을 충간 드렸다. “遺草를 각고 깍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겠나이까?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이 어디에서 보존되오리까? 또 복사가 점을 쳐서 해궤를 얻었는데 그 궤사에서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다⌟ 했으니 왕께선 주역의 궤를 살피소서.”하였다. 그제야 왕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왕은 떨리는 소리로 “고맙소, 그대 말이 옳소”

-박경용 「가야를 세운 충신 박원도」일부



김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된 가야국은 5대 이시품왕(A.D.346-407)때에는 국력이 강성하여 왜와 힘을 합쳐 신라를 침략했다. 신라의 목줄기를 죄기 일보직전에 신라의 내물왕A.D.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청했다. 광개토대왕은 5만의 기병으로 신라를 침입한 왜와 가야병을 격퇴하고 왜병과 가야병을 추격하여 금관가야국을 휩쓸어 버렸다.

-최종철「흐느끼는 가얏고」일부




문화란 눈에 보이지 않던 과거의 몸짓을 현재 속에 재현하여 현존하지 않는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전달하는 표현방식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과거의 존재들을 통해 자기 존재감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을 과거에 들여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글 쓰는 이들은 자신이 과거 당대의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대로 과거와 소통하게 되고 그것들 중에서도 자신과 가장 유대감이 잘 이루어지는 방식을 찾게 된다

이러한 향유 방식은 현실중심, 자기중심이 아니라, 과거의 삶의 방식과 인물, 사건이 현재 화자들의 삶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 향유의 방식은 과거에 중심을 두고 과거의 사건, 사람에 교감하며, 현실의 일상을 넘어선 과거 속에서 신성함을 느낀다

이병관의 시에서 화자는 수로와의 어린 시절의 일상을 공유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화자는 수로와 한 순간 함께하며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삶의 공동 권역으로 편입되어 간다. 이러한 진행은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설득력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삶의 공동체적 권역 속에서 자연스러운 친밀화 과정을 통해 수로와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분의 관계로 발전한 화자의 환영과 만난다 이는 과거의 삶 속에 자기 삶의 목적을 이루려는 재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손영자의 시에서 화자는 수로가 허황후를 맞던 날 이후 죽음이 가까운 날까지 김수로왕에 대한 허황후의 사랑을 표현한다 때로는 말의 침묵보다 부동의 행동이 더 강한 외침이 된다 삶의 현실보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더 솔직하고 진실하다 죽음은 진실을 표현하는 일상적이지 않는 최후의 몸짓이기 때문이리라. 시의 화자는 마지막 몸짓으로 왕의 곁에 자신의 뼈를 묻고자 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영영 돌아가지 않을 양으로. 이는 시적 화자가 허황후와 교감하며, 허황후의 심정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박경용의 수필에서는 용녀의 절제된 충성과, 왕의 지극한 믿음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상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누군가를 꾸준히 믿음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살아가는 동안 상당히 부러운 부분이며, 그러한 인간간계를 맺어가는 서로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상대의 능력을 서로 이끌어 주며, 여전히 인생길을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왕과 용녀 사이에는 이러한 믿음이 흐르고 있다

즉,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군신의 일체된 모습이 나타난다. 서로에 대해 무언으로 깨닫는 확신은 바로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용녀와 왕과의 사이에는 이러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소중한 교훈이 된다.

최종철의 소설은 가야의 멸망을 그려놓은 부분이다 신라가 왜병과 힘을 합쳐 가야국을 치고들 때에, 광개토 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광개토 대왕은 신라, 왜를 휩쓸고 가야국마저 패망시켜버리는 가야국의 슬픈 최후를 그려놓았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들여와 작가의 환영과 동화시켜 독자가 들어올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가야국 사람으로 가야의 슬픔을 의식하는 주체로서 가야의 멸망사를 담고 있다

소설의 극적인 움직임은 여의와 황세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황세의 부마, 뒤 이은 황세의 자결, 그리고 유민공주의 출가, 가야국의 흥망성쇠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소설 중간 중간에 짧은 경구의 시들이 들어 있다 ‘아!여인들아 남자한테 반하지마라/남자가 반하면 벗어날 수 있지만 여자가 반하면 벗어날 수 없다’와 같은 구절들은 현대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꼭 들어맞지 않지만 당시의 사랑에 배신당한 여의의 심정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설득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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