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유형은 찬란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애잔해한다. 하나의 시공간에서 다른 시공간으로 바뀌는 동작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생각도 이와 같다. 하지만 작품구상 속에서 이러한 극적인 시공간 이동을 할 경우, 균형 감각이 상실되면 곤란하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성적이어서 자신만이 지닌 내면의 세계를 잘 표현할 수 없다.
이는 과거의 사실성을 외면하고 자신이 바라는 환영의 세계에 몰입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거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을 통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담아내고, 이로 독자는 작가와 일치감을 느낀다.
깨진, 사금파리들의 무덤에서
묵혀진 세월 같은 그를 떠 올린다.
긴 세월
낙동이 낙동이라 이름 지어지기 전에
강물이 입술을 달삭이며 퍼다 올렸을 바다의 시체들로
질 좋은 고령토를 만들었을 때
그 언저리 낮은 곳
어느 거무스름한 도공이 앉았을 자리
수북이 쌓인
깨진 토기의 잔재처럼
흩어진 생명들, 주워 모아
-안다혜 「터」 일부
이따금 풍경이 허공을 흔들어도
고요는 꿈쩍하지 않고
천년 동안 푸른 잎에 맺혀있던
가야의 소리가 방울방울
호수에 고인다.
-선용 「장군차를 마시며」 일부
옛 가야 황세장군 여의낭자 못 잊어서
말달려 자주 찾아 마음 한 겹 달래던 곳
그 사랑 산속에 묻고 빈 하늘만 보고 섰나
-정미자 「가야를 생각하며-황세봉」일부
귀족의 위력은
하늘 찌를 듯
순수하고 어진 백성은
죽음마저 서슴지 않고
받아들였던 전설 같은 옛일
복수심이 불타올라
호흡을 끊었을까?
권력의 힘에 떠밀려
갈 수 없는 길을
가야만 했던 숙명이었을까?
-최경화「가야의 순장 2」 일부
돌들이 소리친다
통곡한다.
천년을 눌어붙은
이고 지고 떠난 님도
흙 붙안고 산 임들도
깃발보다 푸른
유민산의 손수건을 본다.
-최종철「화평의 땅에서」 일부
위의 작품들은 김해에 생활하면서 가야 문화의 흔적, 숨결,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사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과거라는 극적인 시공간의 이동이 주는 감성은 자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안다혜의 시는 박물관의 유물 토기를 소대로 삼아 상상 속에서 회고 형식으로 쓰인 시이다 산성 지표수가 풍화된 화강암 속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스며들어 석영과 운모가 혼합된 부드러운 백색의 고령토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고령토는 생성과정을 볼 때, 강물과 바닷물과 관련지어 환영을 보인 점은 좀 더 많은 고심을 불러들이게 한다 최근의 한 조사와 그 성과에 의하면 도기 토기는 3세기말 금관가야의 중심부인 낙동강 하류역의 김해·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영남각지로 파급되었다 그래서 과거 문화를 특정 지역과 관련지어 작품으로 다루거나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더 많은 자료에 대한 검증과정을 거칠 필요성을 지닌다.
선용의 시에서 화자는 천년의 가야를 차를 마시며 회상한다. 시의 존재방식은 시인이 느낀 바를 언어로 효율성 있게 전달하는 데 있다. 표현수단이 언어인 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재현해 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하고 자신 있는 부분만을 강하고 역동성 있게 표현하는 특별한 방식이 필요하다. 이 시는 과거의 상황을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실시간 재현해 낸다. 과거라는 한계점을 극복하고 현실에 편승시켜 화자의 환영을 진행시키는 형식이다.
물론 시에서 과거의 재현방식은 수동적이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과거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점은 감정적이지 않아서 좋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선을 추상화시켜 현실적 참여에 매몰된다. 하지만 시인 자신은 과거의 중요한 상황이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는 교감을 느끼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과거문화유산을 드러내어 표현하지 않지만 말없는 과거의 세계에 구속받지 않고 해방되어 있다.
정미자의 시에서는 여의를 생각하는 황세 장군의 생각하는 가야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문화유산을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가야의 문화와 정서를 느끼게 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문화와 현재의 문화가 주는 차이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문화를 대뇌이기보다는 내면으로 소화시켜 소통 가능한 시의 형태로 정리하는 데는 자연스럽게 전통을 흡수하는 작업을 전제로 스스로 해석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려는 시도로 필요하다
최경화의 시에는 가야의 순장에 대한 회고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인류학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몸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양식을 제일 먼저 취해왔다고 한다 후에 노래 악기 그림 설치 조각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이 시에서 스스로 문화유산을 해석하고 그 방향을 설정한 시적 시도는 매우 자연스럽다. 지금도 우리는 몸이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상대의 의사를 읽는다
친한 사람끼리는 말보다 몸짓이 더 잘 통한다 우리 민족이 가무의 민족이라 칭하는 만큼 가무의 몸동작을 통해 자기 존재방식을 표현하고 인간 혹은 신과의 관계를 소통해 왔다 치솟는 귀족의 위력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순장당한 사람들의 몸은 오히려 당대사회를 반영한다. 후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행한 순장은 권력자의 시녀로 혹은 주변부로 밀려난 오늘날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순종의 다른 모습을 담아낸 듯하여 더 애달고 씁쓸하다
최종철의 시의 화자는 흩어진 가야 유민의 모습들을 떠올린다.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이고 지고 떠난 님 흘 붙안고 산 임들’이라 하여 더러는 떠나고 더러는 남아 생존해 온 가야국 사람들의 보여준다. 물리적인 힘에 떠밀려 생활터전을 잃어버린 가야 유민의 한을 깃발보다 ‘푸른 유민산의 손수건’으로 설정해 놓았다. 과거 가야 문화가 화평의 땅에서 계승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증자료가 필요했다. 바쁜 일들을 뒤로하고 김해로 차를 몰았다. 평소 간절했던 김수로왕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관광 지도를 보며, 이곳저곳 돌다 보니, 그간 흩어져 있던 가야의 편린들이 서서히 복원된다
너무도 닮은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의 완만한 곡선은 조부, 조모의 품처럼 넉넉하다. 한참을 넋을 잃다 몇 마디 말도 건넸다. 금관가야의 유적지 수로왕 탄강장소 구지봉. 하늘을 뒤덮은 푸른 솔과 발아래 깔린 황토는 고향처럼 편안하다. 왕후릉 아래 위치한 파사석탑에 어린 옅은 핑크빛 줄무늬는 이국적 미모의 허왕후를 연상하겠지만 내게는 후덕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끝으로 ‘금관가야’를 주제로 다룬 앞의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한 창조적 작업 방식을 지녔다. 이는 김해를 삶의 터전으로 삶고 이를 주제와 소재로 삶아 그들만의 문학이 지닌 독특한 방향성을 유지하는 김해권 문화유산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소통의 기회를 거쳐서 완성되어가고 있다.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짐작하는 데서 나아가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소통에 자료검증을 더한 일취월장하는 작품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