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꽃이 피었다

by 김지숙 작가의 집

과꽃이 피었다


사과꽃이 피었다

단정히 앉은 소나무숲 사이로

꿈같은 세월 촘촘히 닿았다


어제가 버리고 떠난 날들이

봄바람에 구름처럼 일어나

황토밭 사이에 얼굴을 내민다


멀리 바닷물빛 하늘을 닮았다

더 멀리서 비를 몰고 오는지

새소리도 끊어지고

소소한 마음 어지럽다


지난날은 꿈 속이고

앞날은 바다 위의 배처럼 바쁘다




오늘따라 아침에 눈을 뜨니 사방이 뿌옇다 미세먼지 탓인지 비 오려는 흐린 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난겨울 내린 낙엽들 사이로 온통 안개가 자욱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나무 숲은 안개를 세월처럼 온몸에 얹고 서서 명상에 든다

곧 비가 올 것 같지만 쉽게 내릴 기미는 없다 조금 떨어진 산속에 사과꽃이 필 듯 몽아리를 서서히 피우고 있다 하얀 사과꽃이 가득 피어나려는지 사방천지가 안개로 가득한 날

바다는 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고 하늘은 온통 연한 회색과 밝은 하늘색에 가깝게 뒤섞여 있다 싸늘하다기보다는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데 멀리서 커다란 배가 많은 짐을 싣고 바쁘게 지나간다 그 모습이 일순간 바다를 꽉 채운다 이렇게 흐린 날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배를 보면서 삶은 날씨가 만들지 않는 게 분명하다

사람의 손 닿지 않는 곳에 커다란 사과나무가 한그루 숲에 피어 있다 가끔씩 그곳에 가지만 지난 폭풍에도 끄덕 없이 개울가까이 뿌리내린 사과나무가 기특했다 누군가가 먹고 버린 사과씨가 움을 틔우고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고 세월이 흐르면서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너무 커서 높은 곳의 열매는 아무도 딸 수 없으니 새들의 식량창고가 되고 저절로 새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 이곳에 유난히 새들이 많고 종류도 다양한 이유 중 하나를 알게 된다 삶을 공존하는 곳이 숲이고 나무다 이론적으로야 많이 듣고 배우고 외우고 성장했지만 눈앞에서 그 이유들을 보니 납작 누워 죽은 듯이 외워야 했던 교과서 내용들이 살아 일어서서 내게로 온다

오래 산다고 다 아는 것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늦게 아는 것도 뒤늦게 깨닫는 것도 새삼스레 아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늦게 철든다는 말도 있나 보다 뒤늦게 새들의 습성도 숲의 사정도 나무의 마음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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