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포스’(topos)란 원래 논거를 발견하기 위한 장소를 뜻한다고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논의를 할 때 그 논의에 필요한 논거의 장소를 잘 안다면 그 논의를 더울 완벽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논거의 창고가 바로 ‘토포스’이다. ‘아토포스(atopos)’는 비장소성으로 진정한 문학이란 비(非)공간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 감각적 공간성을 또 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김상환)
자꾸 냇가에 앉아 있으려고 집을 나섰다
닳지 않는 펜을 집어들고 흐르는 물에 헹구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하늘을 퍼다 바위 우에 깔아놓는다
카이로스는 언제나 하늘 위에 누워 선잠을 잔다
몸에서 소리가 들릴 때 그는 깜작 놀라 깨곤 한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짓고 아니면 돌아눕는다
새벽녘 내가 하늘을 거두어 올리면
그가 새가 되는 것이 눈에 들어와 하늘을 본다
하늘은 흐리고 새는 빛이 된다
발밑 냇물은 맑고 펜은 닳아 떠오른다
-김정기 「카이로스의 잠」전문
위의 시에 등장하는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기회 (찬스)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남성신이다. 원래는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유래한다. 히오스의 비극 작가 이온에 의하면, 제우스의 막내둥이이인 그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자 기회의 신으로 그의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양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때로 그는 날개가 달린 공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과 동시에 발견했을 때에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즉,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앞에 놓였을 때에 정확하게 판단하고 결단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냇가 앉아 있으려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하늘 위에 누워서 잠을 잔다. 카이로스가 거주하는 공간은 하늘이다. 화자가 이 하늘이라는 공간을 거두어들이면 카이로스는 새가 되어버린다.
결국 어떤 것을 쉽게 잡을 수 없고 잡으려 해도 이미 거리를 두고 있으며 놓쳐버리는 안타까움이 드러난다. 통념상 ‘하늘’은 초월 무한 높음을 의미하고 지고의 권리 우주의 질서를 나타낸다.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천상의 공간은 사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또한 영혼 부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하늘의 색과 모양은 세계 공통이고 둥근 돔형으로 표현된다.
우리시에서 보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서 하늘은 신의 얼굴, 윤동주의 「소년」에서 하늘은 반성의 의미로, 박두진의 「8월」에서 하늘은 지상의 조건을 초월하는 의미로 드러난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하늘은 통념의 하늘이 아니다 여기서 하늘은 카이로스의 침대라는 단순한 공간이지만 화자가 폈다가 접었다 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는 하늘로 새로운 의미를 확장하고 재해석하는 ‘아토포스’의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