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포스(atopos)란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에 부정 접두사 아(a)가 덧붙여진 말이다. ‘장소 없음’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체가 모호한 공간을 말한다. 하지만 문학에서 ‘아토포스’란 통념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이 개인의 가치관과 사고에 의해 변형된 형태로 각인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산문을 들어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내리면서 빗물이 되어
흙담을 움켜쥔 담장이는 담장이대로
단풍나무는 외로울대로 외로워서
가지 끝에 맺히는 물기를
되새김질 하고 있는 중 눈치 채지 못했다
겨울이 점령한 절마당은
얼어붙은 모형처럼 생소한 얼굴로 굳어 있고
석탑에 새겨진 자물통이 지루해진 정적을
삐거덕 삐거덕 끼트린다
바람은 거북등에 쌓인 눈을 흩어버리고‘
명부전 명부도 슬그머니 들춰본다
연꽃을 피워 올리던 산신각의 샘물은
얼음에 갇혀 몇 방울의 물로 고여 있다
영산전 댓돌에 털신 한 켤레 덩그라니 놓인 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까치는 산벚나무껍질을 열심히 쪼아댄다
부도를 지나는데 눈이 펑펑쏟아진다
서둘러 산문을 나선다
돌아갈 길은 멀어 발걸음은 조급해진다
-정유준 「겨울 마곡」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는 우리 자신과 별개가 아니며 우리는 곧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를 점유하고 장소를 통해 자유의 정도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장소는 개인의 가치관을 거치면서 고유한 장소성으로 변형되어 가는데 이가 곧 ‘아토포스’이다 에드워드 렐프는『장소와 장소상실』(김덕현외 옮김 2005)에서 “인간답다는 말은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진정한 장소감은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다.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심오하고도 복잡한 무엇이 장소”라고 한다 이러한 장소의 의미는 장소성 및 ‘아토포스’의 의미와 유사한 특징으로 보여진다.
위의 시에서 ‘마곡사’라는 주된 공간 내에서 ‘산문’ ‘흙담’ ‘절마당’ ‘연산전’ ‘명부전’ ‘석탑’ ‘부도’ ‘굴뚝’과 같은 소소하면서도 다양한 장소가 나타난다. 이러한 장소들은 절의 정경을 그대로 스케치한 느낌이 드는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장소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어떤 곳에 대한 특별한 정취를 기대하고 그것과 만나면 현실적으로 그 특정한 장소에 대한 교감이 깊이 와 닿고 그러한 장소감으로 그곳에 담긴 정서와 사상 등이 느껴진다.
따라서 소소한 장소일망정 우리는 그 장소에서 관계가 형성되고 터전의 조건을 엿보게 된다. 시에서 ‘마곡’은 화자가 특별히 의미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 의미를 각인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의 감정 교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통념적인 사찰의 마곡은 사라지고 자신이 느끼는 마곡에 대한 감정의 깊은 의미 즉 재인식된 마곡은 ‘아토포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