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호

by 김지숙 작가의 집

『잡아함경』에 따르면 ‘만약 사량하거나 망상하면 그것이 반연케 하여 식을 머물게 하며 반연하여 식이 머무르기 때문에 명색에 들어가고 명색에 들어가기 때문에 미래에 생노병사와 근심 슬픔 번민의 괴로움이 있다’ 고 한다

전생에서 오온이 지는 업 중에서 아직 보를 받지 못하고 남아있는 식(識)과 식으로 인해 생긴 명색은 오온에 해당되며 식과 명색은 쌍방향 인과관계 상호의존성 속에 놓인다 대상을 만들어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는 사량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경계에 얽매이게 된다



그게 아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맨드라미처럼 속수무책 비를 맞았다. 유난히 갈증이 심각했던 그 해 여름. 그니가 우산을 팽개치고 후두둑 뛰어갔다. 수상한 구름이 뭉게뭉게 몰려왔다. 돌아선 발자국마다 불면의 낙서가 돌올했다. 내가 죽일 놈이다. 각혈하듯 비가 퍼붓고 있었다. 사마귀가 건들건들 길을 찾고 있었다. 빗소리가 낙인처럼 뜨거웠다. 기약도 없이 계절이 바뀌어 갔다. 해갈되지 못한 후회만 콸콸 큰물로 불어났다. 미련의 세간살이들이 강물 따라 허위허위 흘러갔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나팔꽃처럼 젖고 있었다. 늦가을 낙엽 따라 부음이 왔다. 거짓말, 거짓말, 혼잣말 하며 세월이 흘러갔다. 오늘도 운명처럼 비가 내린다

-양병호 「우중한상·3」



시에서 ‘비’는 화자가 현재를 살면서 추억을 환기하고 이를 확인 하는 점에서 볼 때 식(識)과 오온(명색) 간의 경계이자 틈이 된다. ‘비’가 마음이 지각하는 대상으로서의 현실과 추억의 의미를 가르는 경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비’를 통해 화자는 외부 존재를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를 갖는다 화자는 비 내리는 날 과거의 ‘그니’에 대한 가슴 떨리던 삶을 되뇌이며 잃어버린 ‘첫’마음을 떠나보낸 운명의 의미를 찾아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화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맨드라미처럼 속수무책 비를 맞았다’에서 비를 맞는 행위는 과거의 분위기를 감성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쓰였고 헤어짐의 쓸쓸함과 그니가 떠나간 슬픈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비는 ‘세월이 흘러갔다. 오늘도 운명처럼 비가 내린다’에서 비는 모든 갈등이 해결되거나 오랜 기억 속으로 파묻혀 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비는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에서처럼 ‘그니’와의 사랑의 소멸 혹은 관계 및 틈의 불안정성은 비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리킨다 또한 비의 외연은 ‘각혈’ ‘낙인’ ‘부음’ 등과 같은 나쁜 상황들의 확산을 위한 경계로 보여진다 하지만 결국 마음의 경계를 넘어서느냐 혹은 여전히 반복되는 경계에 놓느냐의 기준은 자신이 그린 영상이 객관적인 실재는 아니라는 점을 어떻게 깨닫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