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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육아-5

자라는 아이와 함께 자라기

by 이파리

아이는 여섯 살부터 어린이집 원아가 되었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한 살 많은 아이들 반에 배정되어서, 마음이 여린 아이는 자신감을 잃었다. 소근육 발달이 더뎌 단추 잠그기 등 섬세한 활동을 잘하지 못했고, 어린이집 경력이 한참 위인 선배들에 비해 야무지지 못한 언행으로 스스로 위축되어 돌아오기 일쑤였다. 지금도 어린아이들에게는 몇 달, 혹은 일 년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젊은 부모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우리는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부모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남편은 여전히 아이의 등 하원을 도맡았고, 선생님들의 전언을 듣고 와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북돋워줄지 고민했으며 어린이집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만들기, 전시회, 재롱잔치에 동반한 남편은 뭇 젊은 엄마들의 부러움과 시샘 가득한 시선을 받곤 했으며 선생님들도 엄마들과는 조금 다른 남편의 적절한 개입과 관심에 만족스러워해 주셨다. 엄마와 아빠의 편을 가르려 들거나 어느 한쪽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고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란 편향되기 쉬운 존재이고 그럴 때, 나와는 다른 위치에서 바라봐 주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남편은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가는 길을 몇 번이고 데리고 다녔다. 초록 불이 들어왔다고 함부로 길을 건너서는 안 된다는 것, 아파트 경내에는 무수히 작은 샛길이 있다는 것을 주지 시켰고 혹시라도 낯선 길에 접어들지 않게 몇 개의 이정표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암기시켰다. 끝내 잘 해내지는 못한 정리하기, 실내화 빨기 등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이 길어지도록 격려하고, 겁 많은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조금 먼 곳에 다녀올 정도의 모험심을 기르도록 북돋워주기도 했다.


남편의 정성과 헌신으로 아이는 무사히 유아기를 지났다. 남편이라고 해서 아이를 돌보는 매 순간이, 아이에게 할애하는 절대적 시간들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체질이 예민해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한사코 아빠 옆에서 잠드는 아들에게 옆자리를 내어주고 험한 잠버릇을 참아내던 남편, 아이의 눈높이에서 놀아주고, 참을성 없는 내가 수시로 언성을 높이는 옆에서 차근차근 아이에게 대화를 시도하던 남편은 육아의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적 성숙도 이룬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어른의 선생님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를 키우는 일이다.

입학식 날,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던지,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잘해보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아이 한 명 한 명의 장점을 살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담임선생님 덕분에 아이의 학교생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고 남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엄마들이 대세인 학부모 모임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부터 아이의 도시락 준비를 했다. 각종 과일로 동물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꼬마 김밥을 예쁘게 담아준 것도 남편의 솜씨였다. 아이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감탄을 듣고는 으쓱했고, 남편은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 도시락을 싸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까지 예쁜 도시락에 심혈을 기울였다.(준비 과정의 심부름, 과일 꼬투리 정리, 김밥 싸기는 내가 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할머니가 계시는 당진까지 아이와 둘이서 자전거 여행을 했다. 남편의 ‘아들과 함께 하는 대망의 프로젝트’ 1탄이었다. 산업도로를 통과하는 코스여서 걱정스러웠지만 애초 일박이일로 계획한 코스를 당일에 수행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이에게 추억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지금도 우연히 그때의 자전거 여행 코스를 지나게 되면 남편은 어린 아들과의 추억을 되새긴다. 엉덩이에 받침이 있는 사이클 복을 입어 귀엽기 그지없던 아이의 뒤태 하며 중간 휴식 지점에서 사 먹은 계란 과자의 맛,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져 고생하다가 할머니 기술자를 요행히 만난 일, 할머니 댁에 근접해서 기력이 소진됐을 때 마지막 피치를 올리던 어린 아들의 기특한 모습 등등 추억이 남편의 뇌리를 가득 채운다.


2탄은 사춘기 시작 무렵 둘만의 지리산 종주였다. 여름 방학에 수행된 이 미션은 이미 아버지보다 키가 커버린 청소년 아들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등산을 좋아할 리 없는 대한민국의 중학교 2학년 학생이 2박 3일 간 단 둘이서 산길을 걷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기뻤을 리는 만무한 일. 떨떠름한 대답이 마음에 걸렸지만, 역시 남편은 용감하게 산행을 준비했다. 나는 그저 이 여행이 불화 없이 마무리되기만을 축원했다.


후일담을 들어보니 밤기차를 탄 아들은 종내 말이 없었고,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서는 멀미가 심해 고생을 했지만, 기뻐하지 않는 대신 불평도 없었단다. 처음에는 말수도 극히 적어서 묻는 말에도 단답형 대답만 하던 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배낭을 대신 짊어지기도 하고, 식사 준비며 잠자리 준비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주었다며 남편은 흐뭇해했다. 마지막 날에는 보기 드문 일출 장면에 아들도 감동했던지, ‘지리산 일출을 보다니 조상님들이 덕을 많이 쌓으셨나 보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천왕봉.jpg

아들로서는 아버지의 소망을 들어드린다는 입장이었겠지만, 가정 내 위계에서 절대적으로 아버지에게 밀리는(!) 아랫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을 터이다. 여간해서는 위계를 내세운 요구나 지시를 피하려 하지만, 지리산 종주만큼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후 기숙형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에 가면서는 더 이상 뭐든 물어보고 말하기 좋아하던 그 어린 아이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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