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함께 키우는 아기
남편은 믿음직한 양육의 책임자였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공무원 출산 휴가는 달랑 2개월. 나는 8월 초에 출산을 하고 시월부터 출근을 재개했다.
아직 앉지도 못하는 아기는 병중인 친정엄마가 초인적 의지를 발휘해 돌봐주셨다. 늦둥이 막내인 데다 여러 가지로 엉뚱하고 산만한 딸이었기에 엄마는 늘 내 걱정을 놓지 못하셨고, 아기를 힘닿는 데까지 몸소 돌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그로부터 5년 전쯤 담도암 수술을 받으신 상태였다. 당시 최고라는 서울대병원의 저명한 전문의가 집도했지만 열 시간을 넘긴 수술 끝에 종양이 정맥에 닿아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부위는 손대지 못했다는 암담한 소식을 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엄마의 신체는 암의 진행도 더디게 진행시켜서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삶을 이어가고 계셨다.
투병 중에도 막내딸의 결혼과 출산이 기쁨이 되었던지 아기가 태어나고 엄마는 기운을 내셨다. 덕분에 죄송스럽긴 했지만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출근을 할 수 있었고 엄마는 커가는 아기를 지켜보는 재미에 웃음이 많아지셨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가 지금도 떠오른다. 정문 부근에 리어카를 받쳐놓고 과일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두 분은 각각 아주 약한 정도의 신체적, 지적 장애를 지녔었는데 어찌나 마음씨가 좋고 소박한 정이 많으셨는지 모른다. 과일을 사지 않더라도 늘 맛보기를 넉넉히 준비하고는 오가는 이에게 한 조각씩 입에 넣어주시곤 했다.
엄마는 아이를 업거나 유모차에 태우고 자주 그 과일 부부에게 놀러 나가셨다. 정이 많은 그 부부는 기력이 부족한 엄마를 대신해서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함께 놀아주셨다. 마음이 급해 서둘러 퇴근한 남편은 과일 리어카 뒤의 소롯길에서 까르르 웃으며 부부 중 한 분과 놀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기 일쑤였다. 바퀴 달린 자동차를 처음 탔을 때도 과일 아저씨가 안전하게 잡아주시곤 했다. 더운 낮 시간에는 아예 돗자리를 깔고 아줌마, 아저씨와 장난감 놀이도 했다.
그뿐 아니었다. 엄마가 아기와 함께 리어카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과일 사러 온 동네 분들이나 무료한 노인들이 한두 분씩 모여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아기도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오가며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보면서 세상이 자기를 아껴준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게다. 덕분에 아이는 낯을 안 가리고 아무에게나 잘 가곤 했다.
그분들이 그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종일 점점 커가는 아이를 혼자 돌볼 엄두를 못 내셨을지 모른다. 몸도 마음도 약해져만 가던 엄마에게 그분들은 양육의 동반자이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비하는 안전망이 되어주신 것이다. 아무 대가도 없이 이웃의 아기를 함께 길러준 동네 어른들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핵가족보다 더 분화된 가족형태가 보편화되는 현실에서 부모, 혹은 한 부모가 아이를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양육 스케줄에서 자연재해, 감염병 등의 이유로 갑작스레 아이가 집에 머물게 되는 하루나 한 나절의 육아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부모가 짬을 낼 수 없는 그 시간 동안을 믿고 맡길 이웃도 필요하지 않을까? 부모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가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봐 주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동네 어른이 있다면 육아의 긴장과 부담이 한결 누그러지지 않을까?
이제 남편과 나는 은퇴를 하고 평생 부족했던 시간 부자가 되었다. 자유를 실컷 맛보고 하고픈 일을 하고 유유자적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어느 바쁜 부부의 아이를 한 나절 돌보거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파수꾼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기꺼이 나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 알림판에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과, 가끔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쪽지가 붙어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사람을 믿기가 어려운 세상이지만 같은 단지 주민들끼리라도 먼저 시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어 진다.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아이는 고모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일 부부와 함께 보낸 시간은 아이의 무의식 속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형태로 저장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