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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2

51 대 49의 마음

by 이파리

100%의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나은지? 짜장이냐 짬뽕이냐, 피자냐 치킨이냐 정도의 일상적 선택을 비롯해서 무슨 일을 확 질러버리거나, 어느 한쪽을 굳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평생의 태도가 되어버렸다. 일종의 선택 장애 같기도 하다. 짜장이든 짬뽕이든 한 가지에 100의 매력을 느끼면 간단할 것을, 거의 항상 한쪽은 51, 나머지는 49의 지분을 지닌 두 선택지 사이에서 길을 잃기 일쑤이다.


이런 성향은 다른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거나 사회 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할 때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독박 육아라니, 자기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말을 쓰는 건 좋지 않아.”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그렇지? 아이가 알면 서운할지도 몰라.”하며 맞장구를 치다가도 “그렇지만...”으로 이어지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독박’이라는 말의 어감이 유독성 물질처럼 느껴지고, 소중한 아이를 돌보는 일에 얹는 표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직관 다음에 따라오는 이성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항상 있는 법이니까.


현직에 있을 때 가르쳤던 학생들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대여섯 명이 있는 교실에는 당연하게도 버르장머리라고는 전혀 없는 학생이 있게 마련이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교과서 준비는커녕 엎드려 있기 일쑤. 설명하는 내내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잡담하기, 벌떡 일어나 사물함에 가서 이상한 물건 꺼내오기, 이유도 없이 교사에게 눈으로 쌍욕을 퍼붓다가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왜요? 내가 어쨌는데요?’하며 본격적으로 한판 붙을 의지를 활활 불태우기... 중2병은 불치라 아직 치료제도 없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제아무리 경력 30여 년의 고인물이라도 용가리에 빙의, 입과 코에서 불꽃을 내뿜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불손하기 그지없는 언행의 이면에 숨은 상황들을 병치시켜보면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서사가 뒤늦게 생각나고, 방금 화르르 타오르던 저주와 분노는 연민으로 뒤바뀌곤 했다. 부모 이혼의 스트레스, 친구들 사이의 오해와 따돌림,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학업이나 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뒤틀린 관심과 애정의 표현 등등, 십 대 초반의 연약한 마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시달리는 청소년의 속내가 환히 비쳐 보이기 시작하면 그들은 방금 100%의 악마에서 이해받아 마땅한 존재로 환골탈태하는 것이다.


현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청소년은 51의 존재이다. 타인에게 이유도 모를 적대감을 독기처럼 쏘아대는 그들을 보면 ‘나한테 왜?, 나는 님한테 전혀 유감없는데?’라고 억울함을 느끼다가도 스스로 세상과 직면하기 시작하는 그들만의 두려움을 생각하면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마음이 된다. 물론 지금 다시 청소년을 기르거나 가르치라고 하면 49의 마음이 ‘놉!’하며 단호한 대답을 할 것이지만.


많은 경우가 그렇다. 지하철에서 젊은이에게 노골적으로 양보를 요구하는 어른들을 볼 때, 눈살이 찌푸려지고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라며 거리를 두고 싶다. 그러나, 어쩌면 폐지를 줍는 일을 하는지도 모를 그들, 나이 들고도 누구의 부양도 받지 못하는 노년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곤고함에 마음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무례나 뻔뻔함을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표면과 이면의 관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뿐이다.


인정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다. 시대정신이 급변하는 시기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서 많은 가치의 충돌을 겪게 된다. 어릴 적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멸사봉공해야 한다는 ‘유교+독재’의 세례에 말랑한 두뇌가 젖어들었고, 대학에 가서는 ‘자유, 정의, 진리’의 깃발 아래 반독재,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사회인이 되어 386이니 486이니, 컴퓨터도 잘 못 다루는 처지에 이름만 업그레이드되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회 정의와 민주 정치 실현을 소망했지만 실제로는 내 앞가림에 급급한 소시민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커지기도 했다.

나 자신의 변화와 적응만이 문제는 아니다. 사람은 세상과 혹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을 공유할 때 안심이 되게 마련이고 나도 그렇다. 그러나 세상이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내가 발 담근 물줄기는 이미 흘러갔음을 절감하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해, 나와 다른 가치관에 대해 거부하는 본능이 꿈틀거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자기와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적대감을 분출하는 청소년처럼.

연가를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아파도 참는 것에 익숙했던 과거의 나는 자기에게 주어진 노동자의 권리를 숙지하고 100% 활용하는 젊은 직장인이 낯설었다. 처음에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잘 들여다보니 나는 누리지 못한 당연한 권리를 당당히 누리는 그들이 부럽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나 자신과 그 시대가 미웠던 것이었다.


결혼 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시댁 내의 역할에 충실하려 애쓰고, 그 노력을 가상히 여긴 어른들이 칭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던 세대로서, 시댁에 손님처럼 귀하게 존재하고, 자신을 잃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신식 며느리들에게 슬그머니 샘이 나는 것은 51과 49의 마음이 내 안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를 함부로 퍼뜨리는 행위를 증오한다. 그런데 여성 흡연가에게 더 가혹해지기가 쉽다. ‘저저,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어휴, 쟤네 부모 속상하겠다!’고 아무 생각 없이 종알대다가, 흡연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나쁜 것인데 왜 나는 젊은 여성의 흡연에 예민한지 되돌아보고 그녀의 흡연에는 반대하지만, ‘그녀만’ 더 비난받을 이유가 없음에 생각이 미친다.


물론 나는 많은 경우, 개인을 존중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변화의 방향성에 적극 동의한다. 내가 겪었으니 너희들도 겪어보라는 태도, 호된 시집살이를 겪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는 더 혹독했던 모순은 시대착오이다.

다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시대와 가치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곧바로 ‘꼰대’가 되고, 더 무섭게는 부지불식간에 시대의 반동이 되기 십상인 상황에서 암중모색하듯 더듬더듬 ‘옳음’을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뿐이다. 그 발걸음이 단단한 대지가 아닌 허공에서 헤매거나 길이 없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지 않기를 바라는 절실함이 나에게 100의 마음이 아닌 51과 49의 마음을 갖게 하였다.


신념은 아름답다. 그 믿음이 옳다는 100%의 확신이 있을 때만 그렇다. 그러나 하늘 아래, 순도 100의 진실이 과연 있기는 할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조차도 부모의 욕망이 투사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정의’와 ‘옳음’도 분명 존재한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의 어딘가에서 우리는 줄타기를 하며 산다. 나는 지금의 옳음에 51을 주는 데서 시작한다.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서 51이 100에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51은 49에게 언제든 자리를 내어줄 용의도 있다. 나의 믿음과 선택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 나는 크게 아깝지 않게 49였던 선택지를 손에 잡는다. ‘이제 너는 51이야.’하면서.


어쩌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도 있겠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내 생각에는 49만큼. 그러나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의 경계에 49와 51의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든 손 털고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며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는 얄팍한 속셈이 아니다. 나의 믿음이 절대불변이며 진리라는 자만에서 벗어나려는 최소한의 지성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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