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첫 숙제
가까운 도서관 들렀다가 서평 쓰기 강좌를 알리는 안내 포스터를 본 것은 겨울이었다. 10명 모집. 신청을 하자 대기 2번이란다. 훗, 내 발이 조금 빠르긴 하지. 마음 놓고 기다리는데, 어째 소식이 없다. 인터넷으로는 5명만 충원하는데 나는 일곱 번째였던 것. 다행히 다시 전화 신청을 해서 등록을 마쳤다.
서평이라. 북리뷰로군.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책을 좋아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면 행복해졌다. 구름이나 연기. 분명 존재하는데 잡히지 않는 생각들을 더듬더듬 단어로, 문장으로, 문단으로 엮어내는 일은 힘들었고, 남의 앞에서 서툰 글을 읽는 일은 부끄러웠지만, 기뻤다.
선생님과 함께 하는 수업은 끝났다.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는 행복감은 동아리 활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투른 나의 글쓰기가 시작된 그 수업의 결과물을 올려본다. 개인적 아카이빙이기도 하고 내 글을 기다려주는 조카와 몇몇 친구들에게 보내는 인사이기도 하다. 몇 달간 글을 쓰면서 내 글에 작은 장점이라도 생겼다면 선생님의 다독임, 함께 한 동료들의 다정함 덕분이다.
첫 수업 과제로 선생님은 이제껏 읽은 책 중 한 권을 골라 추천사를 써보라 하셨다. 머리 복잡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손에 잡게 되는 추리 소설이 떠올랐다. 추천사라기보다는 주관으로 가득한 감상문에 가깝고 이것은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한계이다.
제목 : 현생은 오늘 밤만 버려둡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먹고살자고 온종일 세상에 휘둘리다 집에 돌아오면 나라는 존재가 구겨진 양말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간신히 밥을 끓여 식구들 입에 넣어주고 나면 어느덧 밤. 자아를 성찰하기에도, 꿈과 희망을 소환하기에도 너무 지쳐있을 때. 도무지 ‘지금’과 ‘여기’가 너무 버거운 그 시간에 수십 년 전 영국 어느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나의 일상처럼 언뜻 안온해 보이는 그 마을에서 누군가 살해를 당한 채 발견되고 숨은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동시에 그날의 시간들이 조각조각 맞춰져 간다. 다정하지만 말 많은 노처녀(비혼이라는 말보다 여기엔 이 표현이 제격이다.)와 어딘가 수상한 그림자를 드리운 죽은 이의 주변 사람들, 흥부네 제비처럼 소문을 물어다 주는 하녀와 장사꾼들이 오고 가면서 내 머릿속 마을은 분주히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티끌 같은 빌미들을 잘도 엮어서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다음, ‘펑’하고 무서운 진실을 눈앞에 들이대는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의 노탐정! 그러고는 살인 속에 피어난 꽃이랄까? 귀여운 해피엔딩 사랑 이야기까지 디저트로 등장합니다^^
타인을 살해할 만큼 절박했던 누군가의 비밀을 쫓다보면 이상하게도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지고 천근만근 족쇄 같이만 느껴지던 내일의 하루도 견딜 만하게 작아진다. 게다가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결말의 반전은 ‘세상사 다 괜찮지 않을까?’, 혹은 ‘뭐 어떠면 어때!’ 싶은, 다소 무책임하지만, 방만해서 편안한 마음까지 가져다준다.(사건이 휴지처럼 잘 풀리는 데서 오는 쾌감 탓일까, 아니면 ‘이런 일도 있는데 내 일쯤이야 별것 아니군’하는 심정 때문일까?) 수없는 불면의 밤도 아리아드네의 실꾸러미처럼 졸졸 풀리는 이야기 속에서 단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다만, 짜였던 옷감이 다시 실꾸러미로 환원되는 대환장의 무한 반복이 삶이라는 사실은 어쩔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