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대 원서 제출
방송통신대학에 원서를 냈다. 4년은 길게 느껴져서 편입을 선택했다. 37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 사이사이에 직업에 필요한 연수를 받거나 잠깐씩 뭔가 배우기는 했지만, 호흡이 긴 공부는 아주 오랜만이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전부터 있었다.
퇴직을 하고서야 취미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현실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지적 호기심을 불태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혹은 저것을 더 깊게 알고 싶어’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는 사이에 실행력 으뜸인 이 조용한 열정의 사람들은 방통대 학위를 받거나 시민 대학에 나가거나 혼자 혹은 몇몇이 모여 스터디그룹을 만들고 지성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에세이로 유명한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팟캐스트 중 천자문을 함께 공부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주흥사라는 이가 양무제의 명을 받아 하룻밤에 지어내면서 얼마나 고심을 했던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문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학동들의 기본 학습서. 그러나 지금은 제목만 들어도 고리타분함이 온 동네를 싸악 감싸버릴 것만 같은 텍스트를 선택한 것도 의외였지만, 배울 만큼 배운 두 성인이 매일 시간을 맞춰서 넉 자의 한자를 외워 쓰고 암송하고 뜻을 음미했다는 이야기는 묘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무용의 쓸모. 아무런 효용이 없어 보이는 공부를 하면서 두 작가는 너무도 행복하더란다. 시간이 흘러 외웠던 글자들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글자를 함께 외던 순간은 또렷이 남아있다는 추억담은 나도 그곳에 함께 앉아 고요히 책장을 넘기고 사각사각 글자를 연습했던 듯한 묘한 공감을 일으켰다.
사노라면 좋아서 하는 일이 점점 적어진다. 돈과 시간을 맞바꾸어야 생존이 가능한 우리들의 불행이다. 한 사람이 온전히 바늘을 만들던 시절에는 일에도 흐름이 있고 완성의 기쁨이 있었다. 쇠를 녹이고, 망치로 단련하고 갈고 구멍을 내면서 사람은 여러 종류의 기능을 발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장소를 이동했다. 그 틈틈이 휴식과 딴짓의 가능성도 있었을 터이다. 하루에 단 하나의 바늘만을 만든다 해도 바늘은 그만큼 더 귀한 가치를 지녔을 테고 보람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인간이 과정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는 분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지금, 일은 피로의 주범이고 에너지를 앗아가는 블랙홀이 되었다. 돈이 충분해도 지금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이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늙으신 시어머니께서 돈도 되지 않는 농산물을 끊임없이 경작하시는 마음은 계승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좋아서 하는 공부라니. 기억력은 까마귀에게 오래전 백기를 든 상태, 하나를 들으면 둘을 잊는 장식용 두뇌를 가지고? 자격증을 취득해서 가정경제에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타고나기를 미니멀리스트(잡동사니로 그득한 집안 꼴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맙시다)라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사양하는 성격에? 배우고 가르치느라 평생을 보내고 이제야 자유를 얻었는데 또다시 책과 공부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고?
지식을 넓혀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인성을 함양한다는 교육의 목표는 허무해졌다. 오랜만에 들른 모교는 대기업과 연계한다는 미명 아래 호화롭기 그지없는 건물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익이 최우선인 기업들이 상아탑의 이상을 지켜주려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그 많은 돈을 투자했을 리는 없다. 자본은 이미 교육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 똑똑한 학생들은 지독할 만큼 열심히 공부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가치는 돈으로 환산된다. 고액 연봉은 자아실현에 선행한다.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좋아서 하는 공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그 무엇도 가져다 줄 리 없는 공부, 암기력이 확연히 줄어든 두뇌는 과부하에 시달리겠지. 강의는 여러 번을 반복해 들어도 이해가 어려울 것이고, 멋져 보이는 영미 문학 원서가 웬수로 돌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도 잘 안다. 심각하게 부정적인 결말로는 중도 작파도 있다.
나의 혈액형은 불필요한 사려과다형, 걱정도 팔자형, 돌다리 두드리다 건너지도 못하는 형. 공연히 뭘 하겠다고 나섰다가 끝도 못 내고 망신만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하지만, 살다 보면 둔한 머리로도 뭔가 깨닫게 된다. 젊은 날,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고는 별다른 반성 없이 그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 오히려 그 정체성이 새로운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이다. 새로 시작하는 공부는 나 자신에 대한 호기심, 숨어 있던 나를 새롭게 키워 보려는 시도이다. 꽁생원인 줄 알고 평생 데리고 산 나의 내면에 활달하고 호방한 한량이 살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를 외우면 둘을 잊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린 날의 공부를 곱씹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모르면서 교과서를 통으로 외우던 시간을 많이 아쉬워할 것이다. 암기할 것 투성이라 끔찍했던 역사 시간, 도무지 외계어 같던 물리나 지학 시간, 미분과 적분이 자연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지도 않던 수학 시간들을 추모하게 될 것 같다. 뒤늦게서야 인간이 살아온 과정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게 되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수학 공부도 새롭게 도전하고 싶다.
좋아서 시작하는 공부는 나를 순수한 기쁨으로 이끌어 주리라.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기쁨 외의 어떤 목적도 없는 공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될 열락을 떠올리며 나는 미리 행복하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황홀경에 빠졌던 때처럼 벅차오를 것이고 혼자 주먹을 불끈 쥐게 될 것이다. 거창한 것은 필요하지 않다. 하루에 단 하나의 지식만을 얻는다 해도 충분히 기쁠 것이니까.
학위가 성공인 것도 아니고, 중도 하차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 마음에 든다. 오랜 친구가 남도 민요를 배우면서 악보로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밤늦게까지 피아노 앱을 통해 한 음 한 음을 채록하는 친구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런 친구를 만나 돈 이야기,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 말고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공부는 그런 것이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신 우일신 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는 일. 그러니 영어 공부에 실패한다고 해도 새로운 공부를 멈추지 않아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