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에 대하여
흔히 쓰이는 표현 가운데는 들을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언이 있는가 하면, ‘진짜 그래?’하며 갸웃대게 되는 말들도 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정말, 진짜 유전자에 못된 품성이 깊이 아로새겨진 건가 싶을 정도로 시종일관 밥맛 없는 인간 말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권력에 길들어 안하무인인 사람들, 혹은 권력의 맛을 보자 주구가 되어버린 인간들처럼 구제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한 무리의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 포진하여 세상의 어둠이 되는 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긴 하다.
그들에게는 쿨하게 ‘퉤’를 던지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정말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는가. 우리말의 맛깔스러움, 가려운 곳을 삭삭 긁어주는 질박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을 몹시 좋아하지만, 이럴 땐 ‘개과천선’이라는 한자 성어가 고집스레 떠오른다. ‘과오를 고쳐 선함으로 옮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즐겁자고 수련회를 가면서도 활동목적에는 ‘호연지기를 함양한다’는 식의 거창한 구호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학교 문화에 일찍부터 익숙했고, 어른이 되면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조직에 충성할 것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네 글자로 이루어진 한자어에 경기를 일으키게 될 가능성도 있긴 하다. 아니면 오히려 몸에 착 붙은 듯 익숙하려나?
그러나 개과천선이 갖는 가능성, 일말의 희망이 고쳐 쓰지 못한다는 절대적인 포기보다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고 싶다는 소망의 반영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말을 늘 듣고 산다. 그 말에 담긴 불완전성에 기대어 자신의 못남, 타인의 결함을 흐린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맞다. 우리는 모두 부족함과 결핍을 지닌 미완성의 존재들로 태어난다. 평생 배우고 익히고 ‘충조평판’의 잣대질을 당하면서까지 우리는 늘 자신을 담금질하는 존재의 숙명을 타고났다. 인간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본능대로만 살 수 없고, 이상에 가까워지려는 인간 본성이다.
프리모 레비는 유태인 수용소에서 생환하여 저술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는가, 그 와중에 극소수의 인간은 어떻게 존귀함을 유지하는가를 보여준다. 어찌 보면 ‘선량한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어둔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보여준 적나라한 모습에서 오히려 인간의 ‘고쳐 쓸 수 없음’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더 배고픈 이를 위해 자신의 빵을 나누어 줄 줄 아는 이탈리아 노동자, ‘우리가 수용소에서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항의식으로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세수를 하는 슈타인라우프를 잊을 수 없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인식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평소에는 지긋지긋한 그 통념에 조금이라도 동의할 구석이 있다면 이들과 같은 한 줌의 특별한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어쩌면 그들이 특별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타고나기를 곧고 맑고 강인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기도 하니까. 그러나 누구에게나 가능성의 씨앗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 씨앗을 싹 틔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지성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의 좁은 소견, 즉 옹졸함을 자각한 이후로 어떻게 하면 툭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나, 타인의 행복에 스스럼없이 기뻐하고, 자신을 희망적인 존재로 믿으며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절망한다. 나는 고쳐지지 않는구나. 여전히 바늘귀만 한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타고난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평균 이하의 품성으로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사무친다.
부끄러움도 있다.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습관, 당위를 앞세워 자신과 남을 비판하는 습관은 실제의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왜곡된 상을 만들었을 것이고, 나의 속 모습을 보게 되면 괴리감과 아울러 나를 속물근성에 빠진 이중인격자, 혹은 위선자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의 눈이다. 내가 나를 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결국에는 현실적 욕망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마는 나, 좁디좁은 나만의 성벽에서 인격자인 체하지만, 더 넓은 차원의 공명정대함에 이르지 못하는 낮은 세상의 나, 이상은 있되 땅에 납작 엎드린 나를 차마 똑바로 마주 볼 수도 없다.
이게 끝이라면,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이 여기까지라면?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포청천의 판결처럼 절대적이라면?
‘개과천선’의 여지가 오늘의 나를 내일로 데려간다. 오늘 또 치졸한 마음을 드러내지만, 밤새 되작이고 설득하고 타이르면 작은 못남 하나는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내일은 내일의 못남이 두더지처럼 튀어나오더라도, 끝없이 결핍을 채우고 과오를 줄이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