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 구우며
겨울이다. 춥다. 이상기온이 아니더라도 섣달은 추운 달이다. 동치미가 서걱서걱 어는 날씨이고, 고드름이 처마에 주렁주렁 달리는 계절이다. 요즘 아이들은 섬세하다 못해 극성스런 부모의 손길 덕분에 사시사철 깨끗하고 곱지마는, 나 어릴 적만 해도 누런 콧물을 이미 반질반질해진 소매 끝에 쓱 닦아버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겨울에 또 생각나는 것이 김이다. 까맣고 매끈한 재래김의 달짝지근한 맛도 좋지만, 뒤끝이 쌉싸래한 것이 오히려 입맛을 돋우는 파래김도 뒷길은 아니다. 예전에는 까만 김을 고급으로 쳤지만, 요즘은 오히려 온전히 초록의 파래로만 떠낸 감태가 최고의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초밥집에서 감태 초밥을 먹어본 남편은 곧바로 팬이 되어 단골 김밥집도 감태 김밥을 파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담백한 풍미가 입맛에 꼭 맞는가 보다.
근래 들어서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필수 쇼핑 아이템이 되었을 정도인 데다가 대기업에서 사시사철 먹을 수 있게 다양한 패키지를 선보였지만, 원래 김은 겨울이 제철인 해초이다. 12~1월 사이에 딴 김이 가장 품질이 좋고, 수온이 올라가면 성장을 멈춘다니 얇은 김 한 장에 찬 바닷바람 속에서 김을 채취하고 손질하고 채반에 형태를 잡아 말리고 묶어낸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시사철 입맛에 맞는 포장김을 사 먹으면 그만인 시대이긴 하나 햇김을 톳으로 사다가 불에 구워 먹는 맛을 따를 수는 없다. 어릴 적에는 엄마가 열 장씩 반으로 접힌 김을 한 톳 사 오시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곤 했다. 겨울 밥상의 곰삭은 반찬들이 어린 입맛에는 달갑지 않았던 터였다.
엄마는 이삼일에 한 번씩 김을 구우셨다. 작은 종지에 참기름과 들기름을 섞어 담고, 소금 그릇을 옆에 둔 다음 깨끗한 달력 종이를 찾아 펴시고는 숟가락 등에 기름을 살짝 찍어 김에 스윽스윽 바르셨다. 기름을 바른 김을 잠시 차곡차곡 두어 앞뒷장에 서로의 기름이 배어들게 하고, 그다음에는 소금을 살살 흩뿌리신다. 당시에는 굵은 천일염 말고 일반 가정의 부엌에서 쓰는 가는소금도 알갱이가 꽤 커서 구운 김을 밥에 싸 먹을 때 한 알씩 씹히곤 했다.
기름을 바를 때부터 풍기는 고소한 냄새라니. 맛있는 음식이라도 준비하는 동안까지도 깔끔하고 재미있고 냄새까지 좋기는 쉽지 않다. 생선을 구울 때도 그러하고, 고기 요리 역시 잡내를 없애느라 손을 쓰지 않으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필수 반찬인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끓이는 동안에도 주방에서 퍼지는 냄새를 없애느라 고역이다.
그러나 김은 예외이다. 잘 재운 김을 석쇠에 두 장 겹쳐서 연탄불 위에서 굽는다. 바로 위는 기름에 불이 붙어 김까지 탈 우려가 있으니 기술적으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불의 세기, 김의 상태, 기름이 발라진 정도까지 고려한다. 잔칫집처럼 풍기는 기름 냄새, 풍성한 질감, 구우면서 한 조각 입에 넣어주시면 과하지 않은 기름맛에 어우러진 김이 녹진하게 녹아들면서 배가 고파지곤 했다.
잘 구워진 김을 큼직하게 잘라 밥상 위에 놓아주시면 까탈스런 입맛, 약한 비윗장으로 고생하던 나도 군소리 없이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 가끔 더 값이 싼 파래김을 사 오시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른들 차지였다. 파래김은 기름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생으로 불에 구워 양념간장을 두고 싸 먹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는 종이 씹는 느낌에 강한 갯냄새, 씁쓸한 뒷맛이 영 달갑지 않았다.
나도 어른이 되었고, 입맛도 덩달아 성장하나 보다. 어린 날에는 굽기만 해도 비린내 때문에 고역스럽던 고등어자반이 이렇게 맛있었나 생각하고, 돼지비계가 붙은 부위 역시 즐기지는 않지만, 먹을 만은 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 후 닭발을 사주던 선배 앞에서 기함을 하고는 ‘부르주아집 영애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건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메뉴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몇 가지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근래 유행하는 곱창김을 두 톳째 먹으면서 김은 여전히 맛있구나 생각한다. 며칠 전에 채워 둔 김통이 비어있다. 지난밤 남편의 군입거리로 사명을 다한 모양이다. 부피가 두툼한 김을 가스 불에 살짝 구워 가위로 잘라 통에 담는다. 찍어 먹을 양념장도 만들어 둔다. 파를 송송 다지고, 마늘에 생강청도 살짝 섞는다. 깨를 넉넉히 붓고 고춧가루도 적당히 넣는다. 향기 좋은 들기름만 올리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구운 김 정식이다.
겨울이 가서 나쁠 것은 별로 없지만, 이 월이 지나고 봄 느낌이 나는 어느 날, ‘아 이제 김철이 지나가네’ 하는 혼잣말에는 분명 그해 겨울바다의 기운을 흠뻑 머금은 햇김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긴다. 그 전에 올해의 김을 실컷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