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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록 1

무해한 인사

by 이파리

해가 바뀌었다. 덕담과 축복이 넘친다. SEASON’S GREETINGS.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마음이 가는 이들에게 새해에는 더 좋은 일만 생기기 바라며 인사를 건네는 인류의 습속은 분명 아름답다.

아주 삐뚤어진 심성을 지닌 고약쟁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에게서라도 덕담과 인사를 받고 또 돌려주게 된다.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이웃이 되었든, 과일 가게 총각이 되었든, 그다지 친하지 않지만 업무상 대면해야 하는 동료가 되었든, 이 시기에 우리는 상대와 좋은 말 주고받기를 꺼리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령이나 상황과 관계 없이 무난하게 주고 받는 인사.

“부자 되세요.”

한참 자산을 모으고 집을 사고 주식에 투자할 연령대의 사람들이 주고받을 만한 덕담.

“건강이 최곱니다.”

‘돈의 시간’을 지나 심신의 건강이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알게 된 사람들이 반성과 다짐을 섞어 고개 끄덕이며 주고 받는 말.


분명 그 안에는 잠시나마 상대방을 생각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선의가 담겨 있다. 자기 자신부터 깨끗하고 보송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 있을 터이고, 그 고양된 감정의 흐름 속에서 나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순수한 축하의 마음인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덕담들이 자꾸만 귓가에서 덜컥덜컥 걸리곤 한다. 그 덕담들이, 일테면 관용 표현 격으로 액면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렇다. 모든 좋은 자원이 그러하듯, 복도 한정되어 있을 것만 같고, 받기만 하면 복은 고갈되지 않는 걸까 어릴 적부터 중얼거리던 비관주의자의 피 때문이려나. ‘복’이야, 은혜나 저주처럼 필요에 따라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한정이 없을 수도 있으니 복 받으라는 말은 그 중 받아들이기 쉬운 편이다.


돈 많이 벌라는 말은 어떤가. 자본주의가 지구를 지배한 이래, 돈은 최대 권력자가 되었다. 어린 아이들조차 정의나 자유 같은 정신적 가치를 구현하는 어른보다는 돈 많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세상이다. 현직에 있을 때, 아주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들이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란에 ‘건물주’, ‘자산가’ 등을 써넣어 놀란 기억도 생생하다.

돈의 위력을 어려서부터 잘 보아온 세대이니 그 친구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그 영특한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세상에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가치들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한 기성 세대의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추상적인 가치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만 이로울 뿐, 타인의 불행이나 결핍을 담보하는 가치들이 있다. 돈이 대표적이다. 한정된 자산이 누구에게 쏠릴 때, 반드시 동시대의 누군가는 가난과 착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의, 평등, 사랑, 존중 등의 가치는 나누면 나눌수록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우리는 돈 많이 벌라는 말을, 부자 되라는 말을 축복의 언어로 통용한다. 돈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신분 상승일 테지만, 나는 그 말이 별로다. 다행히 내 주변에는 그런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다. 주변머리 없어서 돈을 못 벌게 생긴 탓인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더 덜컥거리며 귀에 안착하지 않게 된 덕담이 ‘건강 기원’이다. 지난해 서평 모임에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함께 읽으며 건강에 대해 막연히 느끼던 문제의식이 선명해 졌다. 이전부터 장애인 인식에 관한 담론들을 듣고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건강한 정상인’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건강은 ‘질병, 장애’와 대척점에 있는 말이다.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는 그 주체가 원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다. 태어나보니 선천적 장애가 있는 사람,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 뜻하지 않는 병으로 삶의 양상이 하루 아침에 바뀐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못 보셨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불가능한 확률을 실현한 기적의 인간이거나 이웃의 불행에 유난히 관심이 없는 냉혈한일 겁니다.

사실 나부터도 뉴스를 보면 ‘암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엄마, 우리 형부, 사랑스럽던 제자 몇몇처럼 지금은 아름다운 나라로 떠나버린 이들의 암 투병을 생각하면 나는 감히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더해서, 나을 가능성도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을 생각해 본다. 이들에게 ‘건강’은 어떻게 해도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일 수 있다. 건강한, 혹은 잠시 건강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건강하세요’란 덕담이 그들의 마음을 헤집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자신의 탓도 아닌데, 자신은 질병의 수동적 동반자일 뿐인데 세상에서 소외된 채, 자신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기피하고 싶은 상태의 존재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지는 않을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자는 동정과 연민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소망하는 것들의 진면목을 보자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는 가난하고 아프다. 그들을 배제하는 말이 덕담이고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인간으로서의 예의이자, 균형 잡힌 눈을 갖고자 하는 시민의식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가난하고 누군가는 대학에 떨어질 것이며 누군가는 올해도 취업을 못해 숨고 싶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소중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부자 되고 건강하라는 축원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말라는 말을, 가난해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목표를 꼭 달성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그 말들이 실패를 전제한 듯해서 오히려 기분 나쁠 것이라면, 그냥 잘 지내라고, 내가 너를 생각하고 위한다고 말해 주면 어떨까.


‘성불하십시오’라는 불교의 축복이 있다. 신자는 아니지만 그 말에 내포된 깊은 축원과, 누구도 배제하거나 비하하지 않는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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