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비우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날들이다. 한쪽 면의 책장을 비우고 서가까지 떼어낸 후의 일이다. 십수 년 전,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작은 방 하나를 책으로 채웠었다. 책 좋아하는 아내의 숙원을 풀어주느라 남편은 방의 삼 면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이를 재고 너비를 맞춰 서가를 만들었다. 여러 개의 사과 박스에서 숨죽이고 있던 책들이 자신을 써 준 작가의 지명도나 제목, 평단의 평가에 따라 겸손하거나 오만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앉았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책으로 가득한 방에서 그 책 중 한 권을 다시금 펼치고 그 세계에 빠져드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책장의 먼지를 가끔씩 닦아내며 편지 빚을 진 친구를 보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오래 묵은 책을 집는 대신 새 책을 사들여 서가의 빈 곳을 채웠고, 도서관에서 빌린, 아직 읽지 않은 책들에 매혹되었다. 그 끝에서 책을 ‘소장’하고픈 마음에 대해, 욕심에 대해 생각했고, 책들을 비워내기로 했다.
책들은 다양했다. 가장 겸손하지만, 천진한 저력을 지닌 문고본들에 먼저 눈이 갔다. 옛정이 깊어, 가지고는 있지만, 이제 손에 들고 읽을 일은 없는 책들. 본격적으로 책에 눈 뜬 중학생 시절, 동네에 있던 책방 입구에는 보급판으로 만들어진 포켓북 사이즈의 삼중당 문고가 회전 서가에 꽂혀 있었다. 권 당 백오십 원이었나. 도화지 두께의 표지는 한참 가지고 다니다 보면 끝이 돌돌 말리기 일쑤였지만, 한국 현대 문학은 물론 동서양의 명작들을 섭렵한 그 문고판 책들은 어린 나의 보고였다.
‘죄와 벌’을, ‘데미안’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그리고 몹시도 많은 작가의 책들을 삼중당 문고로 읽었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읽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사랑의 미래를 믿고 발을 내딛는 두 주인공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에 밤잠을 설쳤다. 헤세를 좋아했지만, ‘유리알 유희’를 펴 들었을 때는 관념의 벽에 부닥쳐 나의 미숙함에 속이 상했다.
책이든, 영상이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결핍의 시대에 내 손을 이끌어준 삼중당 문고를 나는 수십 년간 버리지 못했다. 비로소 내 서가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기고 처음 자리를 만들어 준 것도 그 책들이었다. 큰 책도 수납할 수 있도록 깊숙한 선반에 두 줄로 꽂아도 넉넉할 만큼 작고 낡은 그 책들. 아쉬움을 가득 담아 한 권 한 권 쓰다듬어 본다. 이별은 가슴 아프다.
이렇게 미련 가득한 작별을 왜 하려고 하는가. 평생 책을 좋아하고 책에서 위안을 받아왔으면서. 왜? 여전히 가장 아름답고 멋진 물건이라 생각하고, 홀로 보내는 시간과 텅 빈 마음을 채워 줄 유일한 대상이라 여기고 있는데. 그런데도,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어디선가 이제는 돌아설 시간이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눈물 흘리면서도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야 마는 연인처럼 어느 날 책들을 골라 아파트 분리 수거함에 내놓고, 서가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툭, 낙하한다. 열두어 살 무렵부터 60이 된 지금까지 내 마음이었고, 정신이었고, 심지어 몸의 일부처럼 붙어 다니던 나의 책들. 첫 월급을 받고는 제일 먼저 결재한 창비 영인본의 두툼한 몸체들을 어떻게 버리나. 설익고 유치한 내 영혼이 역사와 시대와 인간에 눈 뜨게 해 준 책이었는데. 책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한 시대와 그때의 나 자신을 버리는 것만 같다.
버릴 책을 고르는 데 며칠이 걸린다. 이제 그만 버리자 하다가 다음 날 다시 집어 들고는 이 책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두근대던 순간을 떠올린다. 책을 정리하자고, 삶을 가볍게 만들자고, 관념과 사유를 줄이고 생각을 비우자고 다짐했지만, 책을 버리는 일은 쉽지가 않다.
방의 한 면을 비웠다. 여전히 두 면의 서가와 책들이 남아 있다. 이 만큼으로도 나는 충분히 여위고 헐벗어 버렸다. 이상하게도 책들을 정리하고는 새로운 책들을 읽지 못하겠다. 그 대신 남은 책들을 다시 집어 든다. 지금 내 머리맡에 있는 책은 ‘오래된 미래’. 1996년도, 녹색평론사에서 발간되었다. 불모의 땅처럼 보이는 라다크에서 아주 적은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면서 기쁘고 온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이 책을 처음 펴 들었던 그 시절과, 라다크의 완벽한 시기를 함께 떠올리며 책을 뒤적인다. 이 책과도 언젠가는 작별을 하리라.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가차 없는 버림의 시간을 버틴 책들은 안도하는 느낌이다. 미칠 듯한 열정으로 자신을 손에 넣더니 이제 제멋대로 폐기하는 나에게 의문을 던지는 것도 같다. 글쎄. 책들아. 정확한 설명은 아직 하기가 어렵구나. 다만, 가벼워지고 싶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책들을 버릴 수 있다면 덜 중요한 것은 더 쉽게 버리게 되지 않을까? 물성을 가진 것들이 아니라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건져내는 데 집중하고 싶단다. 그리고 내가 이 행성을 떠날 때는 텅 빈 몸이었으면 좋겠어. 너희가 있다고 해서 무슨 해가 되랴마는, 나를 채워 온 물건들을 하나씩 버리는 것도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비움의 실천인 것 같구나.
여전히 나는 원하는 것보다 덜 가볍고, 어수선하고, 이것저것들로 채워져 있다. 책장을 비우면서 다시 결심한다. 비워보자. 가벼워져 보자. 새들은 뼈마저도 속을 비워 무게를 던다는데. 버려진-혹은 작별한 책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이제야 건넨다.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내 존재의 일부였고, 지금도 내 안에 남아 나를 이루고 있는 책들. 세상을 뜨면서도 이것은 끝도 아님을 설파하던 고승들의 이야기를 비로소 조금 이해한다. 나와 책은 분리되었지만 분리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존재는 생명이 끝나도 우주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