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맛
짧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상가라 부르기도 뭣한, 네댓 개의 노점이 모인 장터가 있다. 물론 반찬가게니, 허름한 고깃집, 오래된 김밥집을 포함하면 그럴싸한 먹자골목이 되지만 말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떨어져, 경사진 언덕배기에 늘어선 올망졸망한 연립 주택이며 단독 주택들로 이루어진 동네 끝자락에 자연 발생한 상가인 모양이다. 차를 타고 오가는 길에 빼꼼히 복닥거리는 사람들과 길거리까지 점유한 채소며 생선 바구니가 보이면 어쩐지 마음이 끌렸지만, 막상은 대형 슈퍼나 재래시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 오던 터라 발길이 닿지 않았다. 이제 시간 부자가 되어 동네 산행을 다니다 보니 게으른 나도 다니지 않던 골목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 가게 중에는 싱싱한 채소며 과일을 싸게 파는 곳이 있다. 재래시장보다 가까운데도 값은 비슷해서 자주 들르게 되는 곳이다. 양파나 당근, 깻잎, 상추, 표고버섯 같은 것을 주섬주섬 담다 보면 가지고 간 장바구니가 터질 듯 부풀기 일쑤다. 좋은 식재료가 보이면 얼마나 먹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성적 계산보다 손이 먼저 나간다. 며칠 전에는 길이가 짧고 통통한 쪽파가 쌓여 있어서 덥석 한 단을 집어 들었다. 올해는 풍작인지 값도 헐하고 양도 실하다. 하우스에서 재배된 쪽파는 길이가 늘씬하지만, 노지에서 늦겨울의 찬바람을 견뎌낸 쪽파의 달큰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 대신, 봄기운이 돌기 전, 몸을 웅크리며 냉기를 이겨내느라 키가 작다.
쪽파나 마늘을 까고 다듬는 일은 좀이 쑤시게 마련이다. 간혹 깐 쪽파를 사기도 하지만, 뿌리를 잘라놓은 파는 물기가 빠지고 속대가 밀려 올라오는 통에 보기에도 딱하고 싱싱한 맛은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파김치를 담그려면 깐 쪽파는 어림없다. 각오를 다지고 거실에 신문지를 펼쳐 놓은 다음 커다란 그릇을 준비하고 텔레비전도 켠다. 화면에 시선을 집중할 수는 없지만, 이럴 땐 평소 좋아하던 음악보다는 오락 방송의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배경으로 적당하다.
대파와는 달리 쪽파는 몇 줄기씩 한데 엉켜있게 마련이다. 꼭지를 조심스레 따내면서 얼다녹다하는 겨울 끄트머리의 밭에서 서로 의지하며 온기를 나누었을 쪽파 동지들을 생각한다. 조금만 견디면 봄이 온다고 서로 위로의 말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지나친 의인화는 세상을 왜곡하는 법이지만, 이럴 땐 조금 감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름답고 풍요롭고 자신만만한 것들 앞에서는 나도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만, 약한데 대견한 것들을 마주하면 입 끝은 올라가고 어깨는 부드러워진다.
파김치 담그기는 아주 간단하다. 양파와 무 한 조각, 생강 한 톨, 액젓, 거기에 풀 대신 찬밥 한 술을 크게 떠 넣어 드르륵 갈아주고 고춧가루와 시어머니표 고추청을 달짝지근한 맛이 돌도록 넣어주면 양념은 끝이다. 희한하게도 한국 음식 어디에나 빠지면 섭섭한 마늘이 파김치에만은 어울리지 않는다. 음식만 만들려면 먼저 설치는 마늘을 뒤쪽으로 밀어 넣고 널찍한 그릇에 씻어 놓은 파를 펼치면서 양념을 흰 줄기 중심으로 대충 발라주면 끝. 통에 차곡차곡 담아 하루이틀 숙성시키면 며칠은 반찬 걱정이 없다. 김장 김치는 영문도 모른 채, 신분이 낮아졌다. 소외된 가슴앓이를 겪다 보면 묵은지로 성숙할 것이고, 반찬 없는 어느 날 저녁에 김치찜으로 거듭날 것이다.
며칠 후 내려간 시댁 텃밭에도 짤막한 쪽파가 풍년이었다. 이번에는 한 단 정도가 아니라 몇 아름을 뽑아다가 울력을 한다. 모처럼 내려오신 시이모님도 거드신다. 시누이 두 분과 이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는 민화 모음집보다 재미가 있다. 이래서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 살아온 거 다 말하면 소설 열 권은 될 것’이라고들 하시나 보다. 며칠 전 담가놓은 파김치도 맛이 나쁘지 않았지만, 시골집 마당에서 갓 뽑은 파를 씻어 담근 파김치는 싱싱함이 도를 넘는다. 4월이 막 시작되는 날인데도 햇살은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지만, 작은 통으로 몇 통이나 나눠 담아 이집저집으로 분가시킨 파김치는 나에게 하루치 행복을 남겨 주었다.
시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짐은 항상 내려갈 때보다 커다랗다. 다른 이모님이 주신 싱싱한 햇오이 한 자루, 밭에서 갓 수확한 큼지막한 딸기 한 상자, 어머니가 집 울타리 근처에서 뽑아놓으신 달래 한 봉지 등등. 된장이 떨어졌으니 장독대로 가서 양껏 된장도 퍼담는다. 시어머니께서 직접 재배한 콩으로 손수 담그시는 된장은 시집을 잘 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맛있다. 한동안은 먹을 것이 풍성하겠다.
가물었던 날씨 탓에 오이는 간간히 쓴 맛이 있었지만, 꼭지를 잘라 문지르면 신기하게 쓴 맛이 사라진다. 심심하게 갓 담근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 식구들을 생각하며 아주 약한 간으로 오이소박이도 한 통. 곧바로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들은 간식이라며 맨입에 한 접시를 먹기도 한다.
짐을 풀다 보니 솜씨 좋은 큰 시누이가 만들어 보내주신 밑반찬들이 올망졸망 들어있다. 여러 가지를 이만큼씩 나눠주시려면 품이 많이 드셨겠다. 한국 음식 중에도 밑반찬은 먹기 쉬운 데 비해 손이 심하게 많이 간다. 요즘은 깨끗하고 맛있는 반찬가게도 많아져서 한두 번 사온 적도 있지만, 어쩐지 한 팩을 다 먹은 기억이 없다.
돌나물 물김치, 머위 쌈, 가죽나물, 두릅... 올해도 겨울을 이겨 낸 봄의 생명들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줄 것이다. 고맙고 부끄럽다.